[이호진의 디지털 광장] 정보 민주화와 신냉전
모바일국장
설 연휴 공개된 푸틴 인터뷰 영상
1550만 조회수 세계인 관심 반영
취재원-수용자 직접 소통 가속화
진영 이익 반영 전통 미디어 쇠퇴
가감 없는 정보의 차별 없는 유통
패권국 기득권층 퇴행 막을 희망
열흘 뒤 24일이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2년이 됩니다. 지난 2년 우리 삶은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곡물과 에너지에서 비롯된 공급망 변화는 팬데믹 시기 세계 각국이 정부 재정 지출을 늘린 영향과 맞물려 살인적인 물가 상승으로 다가왔습니다.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는 고금리 기조가 이어져 빚진 서민들이 쓸 돈은 줄었습니다. 소득 대부분을 생활비로 소비할 수밖에 없는 서민층의 늘어난 이자 부담은 고스란히 자영업자들의 비명으로 이어지고, 지역 경제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지구촌 시대, 머나먼 유럽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국지전의 여파가 이렇게 우리 생활에 곧바로 영향을 미칩니다.
설 연휴 중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영상이 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 미국 방송사 폭스 출신 언론인 터커 칼슨의 단독 인터뷰인데, 개전 2년을 맞는 전쟁 당사국의 지도자 인터뷰라는 점을 비롯해 정보 유통 플랫폼 변화까지 여러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습니다.
우리가 국내 언론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외신 뉴스는 미국과 유럽, 일본 언론에서 제공됩니다. ‘신냉전’이 공공연한 현실이고 보면 과거 제1세계 언론이 주된 창구입니다. 러시아나 중국 등 제2세계나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 신흥국 소식도 해당 국가 언론을 직접 접하기보다는 제1세계 언론의 필터를 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골치 아파하는 전쟁 당사자인 푸틴을, 미국 언론인이 인터뷰해, 기존 방송 채널이 아닌 독립적인 플랫폼으로 유통한 것은 주목을 끌 만했습니다. 지난 9일 유튜브에 올라온 이 영상은 13일 현재 조회수 1550만 건, 댓글 27만 건을 넘겼습니다. 지루한 인터뷰 영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기록입니다. 뉴스거리를 제공하는 취재원(source)과 뉴스 수용자가 곧바로 만나는 장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튜브 등에서 활발히 펼쳐져 왔는데, 이런 뉴스 유통의 전통 미디어 대체 속도가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푸틴 인터뷰에 대한 세계인의 높은 관심이 보여주는 듯합니다.
장장 2시간이 넘는 지루한 인터뷰 영상에 사람들은 왜 주목했을까요?
걸핏하면 사망설과 대역설이 떠도는 푸틴이 긴 인터뷰에 대본 없이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은 우리가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과 이미지가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러시아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는 러시아~독일 해저 천연가스관(노르드스트림) 폭발 사고가 사실은 미국의 소행이었다는 그의 말도 단순한 주장으로 치부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1년 전 미국 탐사보도 언론인 세이무어 허쉬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미국의 노르드스트림 폭파 작전 내용을 아는 익명의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미 해군 잠수부들이 폭발 3개월 전 가스관에 원격 작동 폭탄을 설치했다”고 작전 내용을 매우 상세히 보도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발생 1년 반이 되도록 범인을 지목하지 못하자 서방의 진상 조사 의지도 의심받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에서 접하지 못한 정보,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낯선 제2세계 국가 지도자의 언행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인터뷰 영상의 조회수를 끌어 올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의 근원적 책임은 큽니다. 바그너 그룹 수장 프리고진 암살설, 반체제 인사 탄압 등 해명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데에는 국제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갈등·연대의 함수가 작용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 언론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봐서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이번 푸틴 인터뷰를 통해 서방 시민들도 조금은 느꼈을지 모릅니다.
지난 연말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목표를 ‘완전한 승리’에서 ‘협상 우위 확보’로 낮춰 잡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전황이 유리하지 않지만 올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는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우크라이나를 간접 지원한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패전의 멍에를 지는 것보다는 현상 유지를 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장에서 또 1년 가까이 아까운 청춘들이 목숨을 잃게 생겼습니다.
21세기 정보통신기술(ICT) 혁명은 개발도상국까지 퍼졌는데, 세계 정세는 패권국의 이익에 따라 양분·삼분되는 현실에서 현기증을 느낍니다. 희망이 하나 있다면 냉전 장벽을 쌓아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의 퇴행을 막는 데 가감 없는 정보의 차별 없는 유통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전통 언론의 반성과 혁신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일 테지요.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