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골치 아픈 중국인 ‘돈이 최고’에 혀 내둘러
11) 중국인 선원 코 꿰는 법
책임회피와 불평불만에 다루기 힘들어
매사 속속들이 ‘비교불가 돈 지상주의’
공산당원 완장 찬 ‘코민사’ 때론 설쳐
까불다가 강제 하선 철퇴엔 꼼짝 못해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한 것은 1992년 10월 공산당 제14회 전당대회를 통해서였고 선원들을 국제시장에 내보낸 것은 1993년 중국원양해운공사(COSCO)가 국가의 한 부서로 확장되면서였다. 이때 선원들을 감시, 감독, 통제하기 위하여 배마다 공산당원을 한 명씩 배치했는데 이들을 통칭 ‘코민사(Communist Officer)’라고 불렀다. 중국 선원들은 외국인 선장의 지시보다도 코민사의 눈치를 더 살폈는데 그의 평가 점수가 나쁘면 다음 배를 타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중국 선원들과 동승한 것은 1996년부터였다. 인민은 다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체제에 길들어 있다가 자유세계에 나온 중국 선원들은 직책에 대한 상식도 없었다. 어느 중국인 살롱보이(사관실에서 시중 드는 당번)는 식사 시간에 선장, 기관장이 늦게 내려왔다고 화를 낼 정도였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자기를 기다리게 했다고.
처음 중국 선원들과 멋모르고 동승했던 일본인 선장, 기관장은 두 번 다시 동승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토분페이(佐藤文平)라는 일본인 기관장이 회사에 제출한 중국 선원에 대한 보고서 내용에는 지적 사항이 많다. ‘자기중심주의라 협조심이 전혀 없다. 권리만 주장할 줄 알았지 책임감이 없다. 매사에 책임회피만 할 줄 알았지 자기 잘못은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매사에 바쁜 게 없고 믿을 수가 없다.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한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초기에는 급료가 낮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아도 일본 선주들이 중국 선원들을 태웠는데 일본 선장·기관장들이 기피하자 한자를 조금 아는 한국 선장·기관장을 보내게 되었다.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부모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중국어 사전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애재여명(愛財如命, 돈을 생명같이 사랑한다) 다친불여 전친(爹親不如 錢親, 돈이 부모보다 더 낫다) 친시친 재시재(親是親 財是財, 부모는 부모고 돈은 돈이다).’ 중국 선원들과 동승한 한국 선장들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부식비를 아껴 나눠 가지자는 요구였다. 원래 부식비는 남아도 나눠 가질 수가 없다. 그렇지만 중국 선원들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내가 비싼 것 안 먹고 아껴 남긴 돈인데 당연히 내가 가져야지’ 하는 심보였다. 그들은 한국 선원들이 좋아하는 사시미와 김치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자 어느 선장은 이렇게 맞섰다. 그러면 너희들은 식용유 쓰지 말라, 비싼 식용유를 너무 많이 소비한다. 중국 요리는 대부분 불과 식용유를 사용하는데 식용유가 없으면 예삿일이 아니다. 중국 선원들이 수출선을 타기 전에는 한 푼이라도 싸게 구입하기 위해 직접 시장에 나가서 부식을 사다 날랐다. 똑같이 푸르죽죽한 색깔의 작업복에 밑바닥이 평평한 끈 없는 검은 운동화를 신고 여러 명이 장을 봐서 들고 가는 모습을 나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중국 선원들과 동승한 배를 타고 고려아연을 싣기 위해 울산 온산항에 입항한 적이 있었다. 선원들이 한국 물가가 싸다고, 직접 부식을 구입하겠다며 통역을 부탁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따라 나갔다. 슈퍼마켓에 가서는 조금이라도 싼 것을 구입하기 위해 어제 팔다 남은 시든 채소가 없느냐? 아직 다듬어 묶지 않은 채소는 없느냐? 고 물었다. 라면도 많이 사는데 왜 할인을 안 해 주느냐? 하고 따졌다. 재래시장에 가서는 노점이나 가게를 다 둘러보고 맘에 드는 곳에서 흥정을 했다. 시금치, 부추, 마늘쫑, 양파…… 품목마다 깎아놓고 마지막으로 합산해서 계산할 때 또 깎아달라고 떼를 썼다. 옆에서 통역을 하는 내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노점상 아줌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서 “오늘 장사는 밑졌다”며 웃었다.
원목을 싣고 일본에 입항하면 하역을 하기 전에 화물창 소독을 한다. 그날 밤은 당직자만 배를 지키고 나머지는 밖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각자 알아서 하라고 숙박비를 지급했다. 중국 선원들은 그 돈이 아까워 여관에서 자지 않고 생수와 모포를 가지고 나가 지하상가나 공원 같은 곳에 모여서 노숙을 했다.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의 신고로 대리점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돈을 나눠주지 않고 예약한 숙박업소에서 자게 했다. 일본의 작은 항구에는 세관 감시소가 없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중국 선원들은 상륙했다가 귀선할 때 남의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끌고 오거나 화분을 들고 오는 일이 잦았다. 원목을 하역하고 나면 화물창에 나무껍질이 많이 남는다. 이것을 청소하는 일이 꽤 힘들다. 대신에 제법 많은 작업 수당이 나온다. 네 개의 화물창 청소를 마치자면 2~3일이 걸리고 중노동이라 선원들은 녹초가 된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요령을 피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 선원 다루는 데 도가 튼 박 선장은 이때를 노리고 있다. 박 선장은 쌍안경을 목에 걸고 작업 현장을 감시한다. 한나절 동안에 누가 화장실에 몇 번 갔다 왔는지, 허리를 몇 번 폈는지 노트에 다 기록을 하는 것이다. 이 기록부를 보고 작업 수당을 지급할 때 차등 분배를 한다. 아무리 공산(共産)이라고 떠들어도 일한 만큼 지급하겠다는 데 항의하는 선원은 없었다. 누가 열심히 일했고 누가 게으름을 피웠는지는 자기들도 다 알기 때문이다.
차은송(車銀松)이라는 ‘성질’ 고약한 코민사가 있었다. 직책은 1등 기관사였지만 홍위병 출신이라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다. 그래도 당원이라고 선원들에게는 무섭게 군림했다. 부당하다 싶으면 박 선장한테도 삿대질하며 마구 대들었다. COSC0에서 공문이 오면 선원들을 식당에 모아놓고 뭐라고 떠드는지 한 시간이나 걸렸다. 홍위병 때 완장 차고 어지간히 설쳤을 성싶었다. 하도 말썽이 많아 일본에 입항하면 강제 하선시킬 예정이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반쯤 넋이 빠진 사람처럼 헛웃음을 웃다가 혼잣소리로 떠들기도 했다. 박 선장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차은송이 한 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들어왔다. 제 자리에 앉자 손바닥에 이빨을 하나 올려놓고 선장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캡틴, 이거 내가 병원에 안 가고 내 손으로 뺐으니 병원비 오케이?” 박 선장은 노려보기만 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니 말할 수도 없었다. 차은송이 나가고 나자 통신장이 들어와 부연했다. 차은송이 석 달 전부터 이가 흔들려 자기 손으로 뺐는데 병원에 안 갔으니 100달러 달라고 한다는 소리였다.
중국 선원들은 걸핏하면 아프다고 엄살을 떨며 병원 진료 신청을 했다. 그게 귀찮아 선주가 10개월 동안 병원에 한 번도 안 가고 하선하는 사람에게는 100달러를 지급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돈을 달라는 소리였다. 박 선장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전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이튿날 아침에 기관실에 내려가니 차은송은 잇몸에 솜을 박고 있었다. 안 아프냐? 했더니 끄떡없다고 팔뚝에 알통을 세워 보이며 중국말로 뭐라고 목청 높여 떠들어댔다. 쫓겨 가는 마당에 기관 부원들에게 하는 하소연이었다. “내가 이래 봬도 COSC0에 있을 때는 끗발 잡았는데 이 배에 와서는 영어 모른다고 사람 병신 되고 말았다. 엔진 스탠바이, 슬로우 스피드, 풀 스피드, 스몰, 라아지……, 나도 이 정도는 아는데 A, B, C도 모른다고 한다. 캡틴 베리베리 노 굿이다, 날씨가 나빠 주기 RPM이 저절로 떨어졌는데, 나는 손도 까딱 안 했는데 내가 손댔다고 미친개처럼 발광을 하고 나를 쫓아 보낸다. 캡틴은 일소일소, 일노일노도 모르는 싸움닭이다!” 차은송은 내가 못 알아들었을까 봐 흑판에다 ‘一笑一少 一怒一老’라고 적었다. 나는 속으로 숯이 검정 나무란다 싶었지만 드러내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마음은 여린 사람이었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