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여기가 어디?" 세종대왕 울고 갈 외국어 간판들
번화가 중심으로 우후죽순 확산
시민들 불편 호소 민원 잇따라
한글 병기 규정에도 단속 어려워
사회 구성원 간 단절 초래 우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하루 앞둔 8일 서울 종로구 세종이야기 전시관을 찾은 시민들이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부산의 주요 번화가 간판에 영어와 일본어 등 외국어 표기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세운 영업 전략이라고 하지만 가게 이름조차 읽기 어렵다고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이 잇따른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지자체의 한글 병기 실태 점검과 관리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8일 오전 11시 30분 부산진구 전포동 전포사잇길. 전포놀이터시장에서 전포역 방향으로 걷자 영어와 일본어로 적힌 간판이 잇따라 눈에 들어왔다. 전포사잇길 메인 상권인 약 560m 거리에서 확인한 외국어 간판은 모두 32개였다. 영어가 21개로 가장 많았고 일본어 9개, 베트남어와 프랑스어가 각각 1개였다. 대부분 카페와 일본식 주점, 음식점 등이었다. 한글을 함께 표기한 곳은 거의 없었고, 병기한 곳도 아주 작게 표기돼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다.
가게 입구에 서 있는 음식점 메뉴 소개판에는 한국어 대신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만 표기한 곳도 있었다. 메뉴명 역시 ‘하시마아게’, ‘아지후라이’, ‘안키모빠테’처럼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곳도 있었다. 식당 앞을 서성이던 시민들은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며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우리말인 수제비를 영어 알파벳으로 ‘SUJEBI’라고 적거나, 영어와 일본어를 섞은 메뉴도 눈에 띄었다. 특히 최근 일본 현지 분위기를 재현한 음식점이 인기를 끌면서 일본어 간판 가게가 우후죽순 생기는 추세다.
인근 주민 서명숙(70·부산진구) 씨는 “동네에 점점 더 외국어 간판만 많아져 낯설다”며 “어떤 가게인지 알려줄 아들도 곁에 없을 때는 도통 읽을 수 없는 외국어 간판들만 쳐다보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이 난다”고 토로했다.
외국어 간판은 전포동뿐 아니라 광안동 등 젊은 층이 즐겨 찾는 부산 상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해당 가게들은 외국 현지의 분위기를 살리고 다른 가게와 차별화하기 위해 외국어 간판을 활용하고 있다. 외국어 간판을 사용하려는 업주들은 늘고 있다. 해운대구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간판 신고·허가에 앞서 외국어만 사용해도 되는지 문의한 사례가 20건 안팎에 달한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가게 이름은 물론 어떤 업종인지조차 알아보기 어렵고, 세대 등에 따라 이용객이 제한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12조 제2항은 간판 등 광고물의 문자를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하고, 외국문자를 사용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을 병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간판의 크기와 설치 위치 등에 따라 허가·신고 대상 여부가 달라지고, 등록상표 등 예외 사유도 있어 외국어 간판을 일률적으로 단속하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외국어 간판을 둘러싼 민원이 제기되어도 단속은 미온적이다. 부산진구청은 2024년과 지난해 한글 간판 사용을 장려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으나 올해는 별도 추진 계획이 없다. 부산진구청 관계자는 “간판 크기가 작거나 이미 설치된 경우 업주들을 설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외국어 간판이 불편을 넘어 단절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안태형 동아대 국어문화원 교수는 “외국어 간판은 해당 언어를 아는 사람만 읽을 수 있어 언어의 원활한 소통을 어렵게 한다”며 “세대와 계층 등 사회 구성원 간 단절을 초래해 사회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현 기자 kksh@busan.com , 안다은 기자 iknow@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