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부산에서 닻 올린 ‘유산 오디세이’ …존엄과 평화를 향해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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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도쿄대 특임조교수·이코모스 한국위원회 정회원


이정선 도쿄대 특임조교수 이정선 도쿄대 특임조교수

지난 7월 부산에서 개최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성황리에 끝난 지 한 달여 지났지만, 그 여운은 깊다. 문화유산과 인간의 존엄성을 연구하는 필자는 부대행사에서 ‘평화의 수호: 존엄과 정의를 향한 우리의 영원한 유산 여정(Defenses of Peace: Our Enduring Heritage Odyssey Toward Justice and Dignity)’을 주제로 발표했다. 인류의 숨결이 깃든 세계유산을 돌아보며 평화와 존엄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전 세계 유산 전문가들과 공유한 값진 시간이었다.

도쿄대 소속이자 이코모스(ICOMOS) 한국위원회 정회원으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을 10년 가까이 연구해 온 필자에게 이번 행사는 더욱 각별했다. 유엔묘지를 집중 연구하며 미국 유엔본부에서 1000여 장의 사료를 발굴한 열의 때문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품에 안겨 피란길 언덕을 구르며 목숨을 건졌다던 아버지의 고투와 디아스포라의 기억이 나의 유전자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부산 유산 연구를 통해 평화와 인류애를 전파하는 작업은 피란민 후손으로서 나의 뿌리를 찾고, 그들의 희생에 연대하려는 작은 헌신이자 사명이다.

발표에서는 부산 유산의 인류 보편적 가치를 쉽게 전하고자 피란수도 부산 유산의 캐릭터인 ‘금순이’와 ‘금동이’가 떠나는 가상의 유산 여정을 구성했다. 1776년 선포된 미국 독립기념관의 ‘법적 권리와 인간 존엄’,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추모 유적지의 ‘초국가적 기억과 연대’, 남아공 넬슨 만델라 유산의 ‘공동체적 화해 정신 우분투(Ubuntu)’. 이 세 보물은 한국전쟁 당시 인류애와 피란민 구호가 실천된 부산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임시수도중앙청과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은 대한민국의 법적 주권과 국제협력의 거점으로서 미국 독립기념관의 이념과 맞닿아 있다.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는 유엔 깃발 아래 스러져 간 병사들을 기억하는 초국가적 연대의 장소로, 서부전선 추모 유적의 메시지와 공명한다. 또한 피란민의 슬픔과 희망이 교차하던 영도다리와 피란주거지는 만델라의 우분투 정신처럼, 삶의 질곡 속에서 피어난 공동체적 포용과 회복력을 전한다. 부산은 포화 속 인류애의 기억을 70여 년에 걸쳐 자유민주주의로 승화시켜 온 ‘살아있는 평화의 실천 수도’다.

이 교훈을 미래세대에 전승하기 위해 유산을 통한 세대 간 교류, 교육·미디어 확산, 박물관·아카이브 협업, 언어 다원성 존중이라는 4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캐릭터를 등장시킨 까닭은 분쟁 속에서도 아이들이 유산을 통해 배움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유네스코의 핵심 가치인 ‘교육’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금동이의 모습에서 70여 년 전 피란길에 올랐던 한 어린 소년, 나의 아버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번 부산 선언에는 세계유산협약의 기존 5개 전략목표를 관통하는 원칙으로 ‘협력(Collaboration)’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 협력의 정신에 지속가능발전목표의 글로벌 파트너십(SDG 17), 대한민국 보은 정신, 그리고 부산의 상징색인 자주와 파란색이 뜻하는 ‘포용과 화합’의 메시지를 담아내야 한다. 재외동포 연구자 시각에서 볼 때, 부산 선언이 터를 닦은 ‘K협력’의 시대에 대한민국의 역할은 막중하다. 기후변화와 인공지능 고도화,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산을 매개로 공존의 다리를 놓을 때 비로소 평화는 일상의 실재가 된다.

비극의 상흔을 ‘평화의 수호’로 승화시킨 부산 유산은 반목으로 얼룩진 세계를 향해 새 이정표를 제시한다.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로서 부산의 역할은 막을 내렸지만, 2030년 세계유산 등재를 향해 나아갈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인류애를 입증할 또 다른 위대한 오디세이의 닻을 올렸다.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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