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복도로와 자갈치, 박병제가 건져 올린 ‘따뜻한 생명력’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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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구문화원 개항 150년 기념 박병제展
원도심 삶터에 담아낸 서민의 고단함과 희망
체험된 장소성의 재현·삶에 대한 강렬한 예찬

박병제의 '설야'(2002). 이성희 제공 박병제의 '설야'(2002). 이성희 제공
박병제의 '여인'(1991). 이광호 제공 박병제의 '여인'(1991). 이광호 제공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부터 다음 달 다음 달 2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 고 박병제전(展)을 열고 있다. 사진은 박 화백의 '산동네' 작품을 유심히 보고 있는 한 관람객 모습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부터 다음 달 다음 달 2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 고 박병제전(展)을 열고 있다. 사진은 박 화백의 '산동네' 작품을 유심히 보고 있는 한 관람객 모습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 원도심 산동네와 자갈치시장, 고단하지만 치열한 서민의 삶을 특유의 두터운 질감으로 포착해 온 ‘산복도로와 자갈치의 화가’ 고(故) 박병제(1954~2009) 화백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10여 년 만에 마련됐다.

부산중구문화원은 부산항 개항 150년을 기념해 지난 9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 고 박병제전(展)을 열고 있다. 호떡 장수와 학원 강사로 일한 몇 달을 제외하면 평생 전업 화가로 살아온 박 화백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원도심의 골목과 시장,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형상화했다. 이번 전시에는 고인의 작품 41점과 생전 사진 17점, 개인전 도록 등이 소개된다. 출품자는 이성희 이광호 구모룡 최갑진 유경원 조기종 박영경 화인갤러리 등이다.

전시 개막일인 지난 9일 오후 5시에는 ‘박병제의 삶과 작품 세계-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지역 문화예술계 관계자와 작가들, 고인의 딸이 참석해 작가의 생애와 회화적 성취를 돌아봤다.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 오후기획전시실에서 ‘박병제의 삶과 작품 세계-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날 모인 청중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 오후기획전시실에서 ‘박병제의 삶과 작품 세계-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날 모인 청중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질박한 마티에르에 담긴 부산의 삶

이날 세미나에서는 박 화백이 평생 천착한 ‘장소성’과 독특한 ‘회화적 질감’에 대한 미학적 분석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박 화백에게 산복도로와 자갈치는 단순한 외부의 취재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유년기와 성장기를 부산 서구 초장동 산동네에서 보냈고, 어머니는 자갈치 일대에서 생선을 팔았다. 개발 이전의 기울어진 판잣집과 흙담, 구불구불한 골목길 등 곤궁했던 유년기의 ‘원체험(原體驗)’은 그의 회화적 바탕이자 정체성이 됐다.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 오후기획전시실에서 ‘박병제의 삶과 작품 세계-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광호 전 민주공원 관장 발표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 오후기획전시실에서 ‘박병제의 삶과 작품 세계-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광호 전 민주공원 관장 발표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박 화백의 30년 지기로 발제를 맡은 이광호 전 민주공원 관장은 초장동 유년 시절부터 양산 법기리 닭장 작업장, 노포동 비닐하우스, 만덕동, 사직동 녹동화실에 이르기까지 척박한 환경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생애를 소개했다. 특히 나이프로 물감을 겹겹이 올리고 두드리며 짓눌러 색채와 질감의 밀도를 극대화했던 작업 방식을 회고하고, 그가 남긴 원도심 풍경의 역사적 가치를 짚었다.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 오후기획전시실에서 ‘박병제의 삶과 작품 세계-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성희 미학자 발표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중구문화원은 지난 9일 오후기획전시실에서 ‘박병제의 삶과 작품 세계-산복도로와 자갈치를 그리다’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성희 미학자 발표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이어 발표에 나선 이성희 미학자는 고(故) 이동석 평론가가 박 화백의 작품을 설명하며 사용한 ‘따뜻한 비관주의’라는 키워드를 고찰했다. 그는 “박병제의 그림은 추상적 개념이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장소가 화가를 유혹하고 화가가 그 장소를 감각적으로 체험해 낸 ‘생생한 삶의 서사’”라고 평가했다. 또 “거듭 덧칠해 만들어 낸 두터운 질감, 즉 마티에르와 화면의 주름 속에는 자갈치와 산복도로가 품은 피란 시절, 산업화의 역사, 생계의 고단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며 “그 그늘진 삶의 바탕에는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빛으로 충만한 희망과 삶에 대한 강렬한 예찬, 익살스러운 유희가 흐른다”고 강조했다.

박병제 화백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 김은영 기자 key66@ 박병제 화백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 김은영 기자 key66@
박병제 화백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 김은영 기자 key66@ 박병제 화백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의 ‘진경’을 그린 화가

최학림 요산김정한문학관장이 사회를 맡은 종합 토론에서도 박 화백의 예술적 성취와 인간적 면모에 대한 회고가 이어졌다.

박 화백의 후배인 박경효 작가는 “초장동 등 주변부 산복도로에서 자라 자갈치로 내려와 삶을 이어 간 서민들의 전형을 포착한 그의 작품은 ‘부산의 진경(眞景)’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며 가난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포착하려 했던 작가의 시선을 짚었다.

박병제의 '송도 가는 길'(2004). 이광호 제공 박병제의 '송도 가는 길'(2004). 이광호 제공

곽영화 작가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산이라는 도시가 틀을 갖춰 가던 시기에 자갈치와 산복도로라는 상징적 공간을 독창적인 조형 가치로 끌어올린 인물”이라며 전업 화가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박 화백을 증언했다.

방정아 작가는 “다루기 어려운 흰색을 여러 겹의 레이어로 올려 고유한 깊이감을 구현한 기량이 보면 볼수록 놀랍다”며 “부산 미술사에서 김종식 세대와 현대 작가 세대 사이의 비어 있는 고리를 탁월하게 메워 주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최갑진 문학평론가는 만년의 사직동 녹동화실 시절을 떠올렸다. 더는 짜낼 것 없는 빈 물감 통과 막걸리 통이 널브러진 스산하고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특유의 천진난만함으로 주변 사람들과 정을 나누던 박 화백의 모습을 소개해 장내에 웃음을 자아냈다.

고 박병제 화백의 딸인 유란 씨가 고인의 작품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작품 제목과 제작 연도 미상인 이 작품은 유란 씨도 처음 본 것이라면서 반가워했다. 김은영 기자 key66@ 고 박병제 화백의 딸인 유란 씨가 고인의 작품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작품 제목과 제작 연도 미상인 이 작품은 유란 씨도 처음 본 것이라면서 반가워했다. 김은영 기자 key66@

■10여 년 만의 소환…박 화백 유족 참석

2009년 5월 26일, 가을 개인전을 앞두고 작업에 매진하던 박 화백은 향년 56세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부산 작가 40여 명이 참여한 추모전 ‘아름다운 동행’과 1주기 회고전이 2010년 열렸다. 2014년엔 5주기 추모전이, 2021년엔 ‘고 박병제 화백 기념의 필요성과 의의’ 포럼이 마련됐다. 이번 전시는 10여 년 만에 마련된 회고 성격의 전시로, ‘박병제 소환 작업’의 뜻깊은 결실이다.

16년 전인 2010년 박병제 1주기 회고전 때 발간한 화집과 이번 전시 리플. 부산중구문화원 제공 16년 전인 2010년 박병제 1주기 회고전 때 발간한 화집과 이번 전시 리플. 부산중구문화원 제공

세미나에 참석한 박 화백의 딸 유란 씨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집에 남겨진 그림이 많지 않았다”며 “흩어진 유작을 찾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지만, 2029년 20주기 회고전이 열릴 수 있다면 더 많은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와 아버지를 따뜻하게 기억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무성 부산중구문화원장은 “이번 전시는 박병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부산 원도심의 삶과 풍경을 돌아보고, 지역 문화사 속에서 작가의 예술적 위치를 재조명하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며 시민들의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조철현 부산중구문화원 사무국장도 이번 자리가 단발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박 화백을 재조명하는 작은 결실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했다.

고 박병제 화백의 유고작을 통해 부산 서민들의 삶의 궤적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말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추석 연휴에는 휴관한다. 문의 051-442-2550.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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