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얻은 부산의 숙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 성료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면 안 돼
'부산 선언' 답할 준비 해야
피란수도 부산서 해답 찾기
체험·서사 콘텐츠 설계 필요
주거권·유산보존 고민 절실
문화유산과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면 흔히 정형화된 공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온갖 볼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이런 공간이 아이들에게 ‘또 가고 싶은 곳’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유익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공간을 최근 만났다. 지난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기간 마련됐던 공식 전시관 ‘대한민국관’이다.
아이와 함께 찾은 대한민국관은 그야말로 ‘K헤리티지의 집약체’였다. 미디어아트와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유산을 접하게 한 전시 방식은 아이에게 문화유산의 문턱을 한층 낮춰줬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담아낸 ‘나의 유산: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은 물론 이미 지정된 우리나라 곳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시관들은 아이에게 뜻밖의 자긍심을 심어줬다. 국가유산진흥원이 선보인 ‘헤리티지: 타임리스 타임’, 전통 나전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윤슬의 시간’ 등에서는 긴 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이가 눈을 떼지 못했다. 장인들의 시연과 밀양아리랑 공연 역시 뜨거운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한국서 처음 열린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부산에 주어진 특별한 열흘이기도 했다. 특히 회의에서 채택된 ‘부산 선언’은 세계를 향해 무력분쟁과 기후변화라는 시대의 복합 위기 앞에서 인류가 어떻게 함께 유산을 지켜낼 것인가를 묻는 문서였다.
부산은 그 물음에 답할 준비가 돼 있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에 실마리가 있다. 경무대(현 임시수도기념관), 임시중앙청(현 동아대 석당박물관), 국립중앙관상대,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현 부산근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재한유엔기념공원, 하야리아기지(현 부산시민공원),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영도다리, 복병산배수지. 이들 11곳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지켜낸 공간이자 인구 40만 명이던 부산이 10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을 품어낸 도시 실험의 흔적이다. 원도심 한복판의 근현대 유산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국내 첫 사례라는 사실만으로도 유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잠정목록에 오르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2018년 1월 8곳이 조건부 잠정목록에 올랐다가 2022년 12월 9곳으로 재조정을 거쳐 정식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2025년 11월에는 11곳으로 확대됐다. 국내 잠정목록 12건 가운데 단 2건뿐인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되기까지 꼬박 9년이 걸린 셈이다. 게다가 등재 목표 시점은 당초 2028년에서 2030년으로 두 해 늦춰졌다. 도심 개발 압력 속에서 유산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지금도 주민이 살아가는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아직 완전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지금, 부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뚜렷해졌다. 부산 선언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피란수도 유산을 관광 자원으로만 소비해선 안 될 것이다. 이른바 ‘부산병’을 앓는 관광객들이 재차 부산을 찾는 이유는 바다만이 아니라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의 밀도 덕분이다. 유산을 스쳐가는 포토존이 아니라 걷고 보고 느끼는 서사로 만들 콘텐츠 설계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우암동과 아미동처럼 주민이 실제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주거권과 유산 보전이 충돌하지 않는 방식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오랜 유적과 주택가, 시장, 카페 등이 조화를 이루며 역사와 삶이 어우러지도록 한 포르투갈의 ‘포르투 역사 지구, 루이스 1세 다리 및 세라 두 필라르 수도원’이 한 예다.
2030년 등재를 목표로 한 국제 비교연구와 예비평가 대응 등에 행정력과 시민사회의 역량을 집중할 필요성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대한민국관은 부산의 역량을 세계에 알린 기회가 됐다. 특히 부산이 독자적으로 꾸린 부산관은 해양수도 부산의 면모와 함께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서사를 국내외 관람객에게 직접 전하면서 4만 명이 넘는 국내외 관람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열흘간의 경험은 부산이 세계와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예행연습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제기구 인사, 심사위원, 학계 네트워크와의 활발한 상시 교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부산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피란수도’라는 정체성이 지역의 특수한 상처가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닌 자산임을 확인했다. 전쟁과 냉전, 국제원조와 인도주의라는 20세기 인류 공통의 경험이 도시의 골목마다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향후 부산이 세계와 대화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부산이 이번 회의의 열기를 일회성 이벤트로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란다. 피란수도의 기억을 미래도시의 설계도로 바꾸는 일, 그것이 지금 부산에 주어진 진짜 숙제다.
윤여진 편집부장 onlypen@busan.com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