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성의 개념 쌓기] 사이비의 시대, 비트겐슈타인의 불충분함
부산대 철학과 강사
괴담·사이비교 피해 개인 책임으로 치부
사회적 고립 땐 논리·이성 발휘 힘들어
사유 활성화하려면 최소한의 연대 필요
새삼스러운 진단이긴 하나, 음모론이나 괴담 혹은 사이비적 믿음들이 횡행하고 있다. 대검찰청 통계를 보면 사이비교와 엮인 사기, 폭행, 성범죄, 문서위조 등 범죄는 연간 5000건을 넘어선다고 한다. 또한 터무니없는 미망을 파는 주식리딩방 사기의 피해액도 1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 그런데 통상 이와 같은 루머의 피해자에게 건네지는 것은 연민보다는, 그 개인에 대한 지적이다. 어떻게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속을 수 있느냐고, 어떻게 그 단순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이때 피해자는 경계선 지능장애 진단을 받기 일쑤이다. 다시 말해 비상식은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철학계에서 이런 세태와 조응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유행이다. 영미권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쳤던 분석철학은 세계로 뻗어나는 중이며, 최근에는 AI 언어모델과 엮이면서 그 인기가 마치 튤립버블 차트처럼 상승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매력적인 이유는 말할 수 있는 것을 사실상 자연과학으로 한정지었다는 데에 있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로서 논리적 구조를 갖는데, 이는 객관적인 검증이 가능한 영역으로 규정된다. 이때 심령주의? 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물리적 세계에서는 검증할 방법도 없고, 그래서 뭐라 객관화하여 말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유명한 처방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진단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여기엔 논의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이 대단한 분석철학적 논리력이라는 건 어떻게 활성화되는가? 허기가 질 때 밥을 안 먹고 가만히 있다보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인가?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비트겐슈타인적 주체에게 논리적인 세계를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은 사실상 자연발생적이다. 논리력의 활성화 조건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앞서 본 사이비교 문제에 대한 처방처럼, 개인이 자신의 논리력을 충분히, 잘, 적절히, 최선을 다해 발휘하면 될 문제인 것이다. 중점은 세계는 논리적이고, 그 논리의 파악을 방해하는 것들, 즉 이른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거법에 있다. 이때 인간은 무슨 환경과 분리된 논리적 기계, 즉 튜링 머신처럼 취급된다.
이는 후기로 넘어가도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졌듯, 1930년대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대응 관계보다는 실천적 효과 쪽으로 사유의 중점을 옮겼다. 이를테면 앞서 본 심령주의를 다시 가져오자면, 이는 여전히 객관적 허구이지만, 그럼에도 심령주의적 언어 활용을 통해 위안이나 감사를 표현하는 효력은 발생한다. 심령주의는 이러한 삶 안에서 이뤄지는 소통과 실천의 기능을 갖는 언어놀이인 것이다. 이때 심령주의의 폐단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식 처방은 단순하다. 심령적 언어 규칙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점검해볼 것, 혹시나 교주가 자신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교묘하게 단어의 쓰임새를 왜곡한 사기적 언어놀이가 아닌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어의 껍데기에 속지 말고, 그 단어가 실제로 행한 결과를 보라는 조언이다.
그러나 이 전회에서도 일종의 논리적 초인은 그대로 유지된다. 언어놀이의 규칙들을 이해하고 검증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책임이다. 논리성을 무시하고픈 오류에의 충동이 들 때는? “또 다시 발작이로구나”라며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간단히 일축된다. 반문컨대 그러한가? 분석철학이 사랑하는 논리적 언어인 자연과학에서 온 결과에 따르자면, 가난한 환경의 높은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은 고위 인지를 담당하는 전전두피질의 뉴런 연결성을 약화시킨다. 또한 통계적으로도 사이비 종교의 유행과 사회적 세태의 불안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비례 관계이다. 그러니까 사회적 고립이 심화될 때 활성화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이로부터의 즉각적인 탈출 욕망이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가진 사이비교는 바로 이 틈을 파고들며 구원을 속삭인다.
다시 말해 사유가 적절히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불안이 완화되어야만 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이 완화 조건은 곧 최소한의 연대를 뜻한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논리성의 활성화는 요원하다. 고야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고 했다. 진실은 반대이다. 괴물이 깨어나면 이성이 잠드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이 괴물의 고전적인 이름은 가난과 고립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하자면,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거법이건 언어놀이에 대한 기민함이건 간에, 중요한 건 그 사유를 활성화하기 위한 조건에 있을 것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오류가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실로 불충분하고도 불충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