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나
잘 하고 싶지만 불안한 마음 이어져
휘청이는 자신 인정하고 버티는 것
어른이 되면 더 단단해질 줄 알았다.
지도하는 제자의 박사논문 심사를 앞두면, 젊은 날 내가 심사받을 때처럼 긴장한다. 논문 초고를 완성하고 예비 심사와 최종 심사를 거치는 과정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기에, 같이 몸살을 앓는다. 소외된 이들의 삶과 읽기를 오래 들여다본 제자의 연구는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했다. 이 질문을 붙들고 근무하던 학교까지 휴직하며 연구에 매달리는 제자를 지도하다 보면, 나는 다시 처음처럼 긴장과 불안에 흔들리는 연구생이 된다.
은퇴가 머지않았는데 중요한 연구 용역 의뢰가 왔다. 여러 후배 교수와 제자들이 참여하는 과제였다. 제자들에게 연구비와 경험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선뜻 수락하고 연구책임자를 맡았지만, 시작과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이 일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늘 책임을 앞두고 흔들렸다. 맡은 일을 어떻게든 해내기는 했지만, 내가 충분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늘 남았다.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책을 읽고 공상하는 시간이 좋고, 심심하면 기타를 연주한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강변으로 나간다. 강을 따라 홀로 페달을 밟는 동안에는 아무런 역할도 맡지 않은 자유로운 내가 되어 행복하다. 해가 기울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어릴 때 멋진 어른을 꿈꾼다지만,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골방에서 킥킥대며 만화책을 읽던 아이로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상은 나를 어른이라 불렀고, 남편과 아버지와 교수의 자리가 차례로 맡겨졌다. 잘 해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근근이 버티다 보니 어느새 예순을 넘겼다.
장대비가 퍼붓던 어느 날, 예고 없이 내 연구실을 찾아와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제자를 떠올린다. 제자는 지독하게 책 읽기를 좋아했고, 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일찍 박사학위를 받았다. 혼자 살 팔자라며 웃던 제자가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나는 말리지 않고 주례를 맡았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강의와 연구, 살림, 출산과 양육까지 이 사람이 모두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그 제자는 아픈 아이를 데리고 먼 병원을 오가며 강의와 연구를 이어간다. 제자는 꿈꾸던 어른이 되었을까. 힘든 제자에게 연구 용역의 중책을 맡기는 나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새벽에 자꾸 깬다. 의사는 노화의 징후라 하지만 고통스럽다. 잠에서 깨면 고민거리가 줄을 서고 있어, 나는 머리맡에 늘 이어폰을 둔다. 음악 속에 고민을 묻고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이다. 그날 새벽 우연히 찾아온 노래는 머무르의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였다. “가끔은 무너지는 새벽 밤에도 겨우겨우 버티는, 작은 모난 나를 어른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낮게 울리는 노랫말 한 구절에 숨이 멈춘 듯 마음이 멈췄고, 감추었던 불안과 눈물을 들킨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울었다. 어른이 되면 더 단단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작은 말 한마디에도, 홀로 맞이하는 새벽의 불안에도 흔들린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저서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며 제 삶을 책임지는 존재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 불렀다. 나는 이 말을 읽을 때마다, 그 ‘할 수 있음’이 언제든 상처받고 흔들릴 수 있는 ‘취약함(vulnerability)’을 품고 있다는 데 마음이 머문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늘 휘청이는 한계가 모두 나의 모습임을 인정하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흔들림 없는 완성이 아니라, 그 취약한 자신을 데리고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가는 일이다.
부족한 자신을 데리고 또 하루를 살아낸다. 강변을 달리다 바람에 핸들이 흔들려도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자전거처럼. 나는 아직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뒤척이다 자주 깨는 새벽은 유독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