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이 라 스칼라 무대를 바꿨듯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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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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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는 대중적 인기에 그치지 않고 내면에 스며드는 단계, 즉 소프트 파워로 발전했다. 한국 영화의 주제 의식이 고전 오페라의 결말까지 바꿔 놓는 경우도 낯설지 않은 이유다.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이 2022년 무대에 올린 ‘리골레토’는 영화 ‘기생충’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서사를 차용한 파격적인 연출로 충격을 줬다. 만토바 공작은 박 사장, 리골레토는 김 기사로 설정되고, 각각 화려한 빌라와 비루한 은신처라는 공간 격리를 통해 계급적 갈등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원작에 없는 집단 봉기와 복수극이 펼쳐지고, 공작과 귀족들이 살해되는 결말은 평단에 격렬한 논쟁을 불렀다. 주세페 베르디가 의도했던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중세 신분사회의 불합리를 현대의 양극화 프레임으로 재현하려는 문제의식과 도전 정신만큼은 인정받았다.


이탈리아 라 스칼라의 2022년 '리골레토'는 원작과 달리 봉기와 유혈극으로 끝난다. 영화 ‘기생충’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서사에 영감을 얻어 재해석한 결과다. 사진=라 스칼라 홈페이지 이탈리아 라 스칼라의 2022년 '리골레토'는 원작과 달리 봉기와 유혈극으로 끝난다. 영화 ‘기생충’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서사에 영감을 얻어 재해석한 결과다. 사진=라 스칼라 홈페이지

원작의 과감한 변주는 제작극장의 권위와 능력을 상징한다. 어설픈 해석은 원전을 망치지만, 설득력 있는 재해석은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시대의 질문으로 작품을 읽어내고 무대·음악·연기·기술의 총체적 언어로 구현해 낼 수 있어야 본격 제작극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시설만 번듯하다고 언감생심 넘볼 수 없다는 의미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대중적 공연예술로 발전했고, 밀라노에서 꽃을 피웠다. 그 전통은 각각 라 페니체와 라 스칼라로 이어져 있다. 라 스칼라는 한국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축전에 단원 400여 명이 내한해 ‘투란도트’를 공연한 것이다. 거액의 비용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한 개발도상국의 용틀임을 세계에 알리는 팡파르였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 극장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음악감독으로 정명훈 지휘자가 선임돼 올해 시즌부터 지휘봉을 잡는다.

중국 상하이대가극원(Shanghai Grand Opera House)과 부산은 묘한 대비를 이루는 선택을 했다. 상하이는 17일 개관하면서 라 페니체의 ‘토스카’를 초청했고, 부산은 2027년 9월 개장을 목표로 라 스칼라 ‘오텔로’ 무대를 계획했다. 하지만 부산시는 14일 예산·준비·지역 연계성을 고려해 해외 명문 극장의 초청을 중단했다. 개관을 2028년으로 미루고 준비 기간을 거쳐 아시아 대표 제작극장으로 육성한다는 방향도 제시했다. 초청 공연 취소와 개관 일정 연기는 분명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를 후퇴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찬반에서 드러난 논점을 정리하고 새 판을 짤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중국 상하이대가극원(Shanghai Grand Opera House)의 2000석 규모 주 공연장인 ‘하모니홀’ 전경. 올해 10월 17일 개관한다. 사진=중국 상하이시 홈페이지 중국 상하이대가극원(Shanghai Grand Opera House)의 2000석 규모 주 공연장인 ‘하모니홀’ 전경. 올해 10월 17일 개관한다. 사진=중국 상하이시 홈페이지

신생 극장이 풀어야 할 난제는 쓰나미처럼 덮쳐 온다. 콘텐츠와 제작 역량, 재정 문제는 어쩌면 라 스칼라 논란 이상의 시련일 수 있다. 백전노장의 세계 유명 극장들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난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우선 콘텐츠다. 20년을 기다린 북항 재개발 지역에 세계적 수준의 예술공연장이 들어섰다고 기뻐할 지역민들 앞에 어떤 잔칫상을 차릴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점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105억 원이라는 거액의 위압감 때문에 개막작에 대한 논의가 허술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초 개관 기념 페스티벌 리스트에 포함된 오페라 ‘오텔로’와 ‘레퀴엠’은 모두 베르디의 걸작이다. 하지만 ‘오텔로’는 인종, 젠더, 권력, 폭력이 난마처럼 엮인 고난도 비극이다. ‘Dies irae(진노의 날)’로 널리 알려진 레퀴엠은 죽음과 심판을 다룬 장례 미사곡이다. 예술적 완성도 측면에서 손색이 없고 성악과 합창, 관현악이 어우러지는 대작인 점에서 최신 기술을 갖춘 신생 공연장의 강점을 드러낼 기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 랜드마크가 탄생하는 날에 어울리는 최선의 레퍼토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부산시는 지역의 역사와 삶,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창작 오페라를 개관 시즌 때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역동하는 부산의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하는 작품들 대신 ‘지역의 DNA’를 보여주겠다는 방향은 옳다. 다만 선언만으로 제작극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획부터 대본, 작곡, 연출, 무대, 연습, 공연, 재공연까지 이어지는 제작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부산오페라하우스가 진정한 제작극장을 꿈꾼다면 개관작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제작 역량을 입증하는 첫 작품이 돼야 한다.


부산항 북항에 올 연말 완공 예정으로 지어지고 있는 부산오페라하우스 전경. 부산일보DB 부산항 북항에 올 연말 완공 예정으로 지어지고 있는 부산오페라하우스 전경. 부산일보DB

전 세계 오페라극장은 관객 감소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신생 극장을 여는 부산은 그 냉엄한 현실에 맞닥뜨릴 각오를 해야 한다.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파업은 출발점에 선 부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극장 측은 티켓 판매가 수입의 15%에 불과해서 연간 1500만 달러(우리 돈 200억 원) 적자가 발생한다며 최대 26% 임금 삭감안을 제시했다가 반발을 불렀다. 공연을 할수록 손해가 누적되기 때문에 무대 횟수를 줄여야 하고, 이 때문에 단원들이 받는 보수가 줄어드는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악단이 거리 시위에 나선 탓에 시즌 개막작까지 취소되자 시장까지 중재해 나선 끝에 노사는 가까스로 합의안을 도출하고 공연을 재개할 수 있었다.

명불허전의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도 운영난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오죽했으면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이 유료 좌석 7만 개를 추첨으로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겠나. 맘다니 시장은 지난달 24일 ‘모두를 위한 오페라(Opera for All)’ 캠페인을 발표했고, 동시에 극장 측은 15억 달러(우리 돈 2조 원)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오페라극장은 시 산하 사업소가 아닌 민간 재단이 운영한다. 그래서 시장이 노사 중재나 관람 캠페인을 벌일 의무는 없다. 하지만 오페라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멈춰서는 안 되는 도시 문화 인프라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행정이 두 팔 걷고 나서는 이유다.

후원자의 기부와 기업의 협찬만으로 운영에 한계를 드러낸 클래식 공연장에 공공 재정은 어디까지 투입돼야 하는가. 그 균형점을 찾는 데에 전 세계가 골몰하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지역 오페라극장을 운영하게 된 부산시 앞에는 외로운 결단이 기다리고 있다. 선례를 찾기 어려운 고독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오페라하우스 개관을 주관하게 될 클래식부산 대표의 공모 절차가 진행 중이다. 12월이면 새 진용이 갖춰지고 극장까지 완공된다. 개관에 앞서 남은 1년 남짓의 시간은 여유롭지도, 촉박하지도 않다. 다행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열악한 출발점은 아니다. 정명훈 지휘자를 비롯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클래식 역량도 만만찮다. 명문 오페라극장조차 K콘텐츠에서 영감을 얻고 경쟁력을 키우려는 시대다. 라 스칼라 초청 반대 논거 중 ‘문화 사대주의’론까지 제기된 대목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오징어 게임’이 생존 경쟁의 잔혹한 은유로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듯, 한국은 이미 문화 콘텐츠 강국 아닌가.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저력을 오페라라는 종합예술로 옮겨 놓는 상상력과 제작 시스템이다. 부산에는 항구와 바다, 피란과 이산, 산업화와 노동, 이주와 교류가 켜켜이 쌓인 서사가 있다. 이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로 빚어내는 것이 제작극장의 과제다. 영화 ‘기생충’이 라 스칼라의 ‘리골레토’를 바꿔 놓았듯, 부산의 이야기가 세계 오페라의 새로운 해석과 창작을 이끄는 날을 꿈꾸자. 그때 비로소 부산오페라하우스는 세계적 극장을 흉내 내는 무대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제작극장으로 우뚝 설 것이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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