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 “새로운 시도에 대한 응원,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부일영화상 2026]
■여우조연상 ‘어쩔수가없다’ 염혜란
박찬욱의 파격 선택, 50대 배우의 새 가능성
모성상 고민 씻어낸 ‘아라’, 도전 끝에 얻은 확신
주연 욕심 내려놓고 쥐어든 영화 조연상의 무게
평범한 사람의 역사 품고 또 다른 얼굴 찾아나서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염혜란이 레드카펫으로 입장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2026 부일영화상 시상식이 7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염혜란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50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다양해지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데,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 응원받는 느낌이었어요. 저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조연상이라 감사해요.”
염혜란 배우는 영화 ‘어쩔수가없다’(감독 박찬욱)에서 실직자 구범모(이성민)의 아내 아라를 연기해 제35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아라는 오디션에 번번이 떨어지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연극배우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한다. 만수(이병헌)와 범모, 아라가 뒤엉켜 싸우는 장면에서 결정적인 총성을 울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여우조연상 염혜란 배우가 동료 영화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무대로 오르고 있다. 이원준 기자 lwj@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여우조연상 염혜란 배우가 동료 영화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무대로 오르고 있다. 이원준 기자 lwj@
염혜란은 ‘어쩔수가없다’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동시에 ‘내 이름은’(감독 정지영)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두 부문에 함께 이름을 올린 만큼 여우주연상을 받지 못한 데 아쉬움이 있을 법했지만, 그는 “전혀 아쉽지 않다”고 말했다.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요. 사실 제가 주연을 맡은 것도 너무 빨리 온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여우주연상을 받게 될까 봐 오히려 두려웠습니다. 상은 배우가 잘해서만 받는 게 아니잖아요. 시대 상황이나 외부적인 요소들도 영향을 미치니까요. ‘내 이름은’을 응원해 주시는 마음 때문에 제가 받게 될까 봐 걱정했어요. 그래서 ‘어쩔수가없다’로 조연상을 받은 게 오히려 행복합니다. 조연상도 큰 상이잖아요.”
그에게 영화 여우조연상은 더욱 각별하다. ‘동백꽃 필 무렵’, ‘경이로운 소문’, ‘마스크걸’, ‘폭싹 속았수다’ 등으로 여러 조연상을 받았지만 대부분 시리즈 작품으로 받은 상이었다. 영화에서는 ‘시민 덕희’ 이전까지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일이 많지 않았다.
“영화에서 이렇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전에는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 많았고, 분량이 굉장히 적은 조연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영화로 조연상을 받는 것은 처음 받는 상처럼 느껴져요. 저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여우조연상을 받은 염혜란 배우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아라’를 만나기까지
‘어쩔수가없다’의 아라는 염혜란이 이전까지 보여준 인물들과 분명히 다르다. 오디션에 번번이 떨어지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연극배우이지만,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한다. 염혜란은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아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박찬욱 감독님 작품이라면 보지도 않고 선택한다는 배우들이 많잖아요. 저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대본을 읽고 첫 장면부터 깜짝 놀랐습니다. ‘아라 역할이면 이건 못 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박찬욱 감독에게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직접 물었다. 감독은 “그 역할을 잘할 것 같은 배우가 맡으면 보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익숙한 이미지의 배우가 아라를 연기하는 것보다,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배우가 낯선 인물을 보여주는 편이 더 흥미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염혜란은 박찬욱 감독이 배우에게 기존의 모습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얼굴을 끌어내는 감독이라고 말했다. “늘 새로운 것을 해볼까 하는 동기와 의지를 주는 분이라는 거죠. 그런 지점에서 저도 운 좋게 감독님과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포스터. 부산일보DB
아라를 연기하는 과정에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도전이 한꺼번에 놓여 있었다. 뱀 장면과 노출, 성적인 장면이 있었고, 모두 그에게 부담이 큰 표현이었다. “실제 뱀을 쓰면 못 한다고 말씀드렸고, 노출 장면도 걱정됐어요. 제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들이 여러 개 겹쳐 있었습니다. 박찬욱 감독님에 대한 신뢰로 선택했지만 부담이 굉장히 큰 작품이었어요.”
그럼에도 아라는 염혜란에게 필요한 역할이었다. 익숙한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배우로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이미지가 한국의 어머니로 고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어머니 역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요. 배우인 엄마, 기자인 엄마, 아이를 잃은 엄마처럼 엄마라는 존재도 정말 다양하잖아요. 그런데 한 가지 성격을 가진 엄마로 고착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염혜란은 지금까지 모성의 이미지와 맞닿은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그 이미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어머니상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경계했다. “그 이미지를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많은 분이 저를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로 대표해서 생각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 걱정됐어요. 그런 상황에서 ‘어쩔수가없다’는 다른 것을 제시해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주저했고, 공개된 뒤에는 부끄러워서 숨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저에게 굉장한 위로이자 응원입니다.”
그가 이번 수상을 “새로운 얼굴을 응원하는 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여우조연상을 받은 염혜란 배우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lwj@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
염혜란은 특출난 능력을 가진 인물보다 누구나 주변에서 만날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린다고 했다. “제가 워낙 평범한 사람이기도 해요. 특출난 능력이 있거나 비범한 사람은 아니니까, 제가 잘 겪을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누구 같고, 우리 할머니 같고, 우리 엄마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저에게는 더 많은 울림을 줍니다.”
그가 말하는 평범함은 단순하고 무난한 삶을 뜻하지 않는다. 겉으로 평범해 보여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시간이 있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의미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다 자기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다루고 들여다보느냐는 작가와 연출자의 몫인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삶을 들여다보면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폭싹 속았수다’와 ‘내 이름은’ 역시 그런 관점에서 그에게 남은 작품이다.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자신의 분량이 많지 않아 작품이 큰 반응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제가 맡은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1, 2화에 중심적으로 나오고 이후에는 한 번씩 툭툭 등장하는 정도였죠. 이렇게 많은 분들이 그 작품으로 저를 기억해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 이름은’에서는 김민기의 ‘친구’를 직접 불렀다. 처음에는 노래가 가진 상징성이 너무 커서 반대했지만, 감독의 제안에 따라 정순이 친구를 생각하며 읊조리듯 녹음했다. “김민기 선생님의 ‘친구’는 제 세대가 가진 상징성이 너무 강한 노래예요. 제가 그보다 잘 부를 자신도 없었고, 제가 불러서 그 노래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이 노래를 잘 부르는 것보다 정순이가 친구에게 건네는 말처럼 불러주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바닷가에서 혼자 오래된 노래를 읊조린다고 생각하고 녹음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제 나이를 찾아가다
염혜란은 실제 나이보다 나이 든 인물을 오랫동안 연기해왔다. 20대 후반 연우무대에 들어가 극단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노역을 맡는 일이 많았다. 노안인 데다 목소리와 분위기가 나이 든 인물과 잘 어울렸고, 나이 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있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나이 든 역할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제 나이에 맞는 역할도 하고 싶었죠. 그런데 그런 작품을 계속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이거 말고 다른 것도 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인물의 나이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세상에는 많은 아줌마가 있고, 똑같은 아줌마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중요한 건 그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니까요.”
영화 '내 이름은' 포스터. 부산일보DB
‘내 이름은’의 정순 역시 전형적인 피해자는 아니었다. “정순은 단순히 나이 든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보면 가해자적인 측면도 있는 인물이었죠. 그래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갈수록 저는 오히려 젊은 역할을 많이 맡고 있어요. 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제 나이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 ‘도깨비’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힘을 실감하게 한 작품이었고, ‘동백꽃 필 무렵’은 새로운 역할에 대한 자신감을 준 작품이었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자존감이 높은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역할을 어울린다고 생각할까 불안했는데, 작품이 잘되고 많은 분이 좋아해주셔서 ‘나도 해볼 수 있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염혜란 배우가 포토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lwj@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염혜란 배우가 포토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lwj@
2026 부일영화상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염혜란 배우가 포토월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lwj@
■계속 연기하는 이유
염혜란은 1999년 연우무대에 들어가 오랫동안 극단 생활을 했다. 이후 연우무대 출신 배우들이 모여 만든 극단 이루에서도 활동했고, 방송과 영화 작업을 병행하면서 지방 공연을 이어갔다. 한 번도 연기를 완전히 떠난 적이 없다. “타고난 배우는 아닌 것 같아요. 다만 하다 보니 이제 제게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연기를 쉰 적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복이고 행운이에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이 든 역할이 잘 어울렸고, 나이가 들어도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있었다는 점을 꾸준히 일할 수 있었던 이유로 꼽았다. “예쁘고 젊은 역할을 맡는 배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노역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계속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제 복이기도 합니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는 인물에 대한 겸손함과 열린 마음이라고 했다. “그 인물이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그 사람의 역사를 내가 대신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고,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드러나지 않을까요.”
염혜란은 앞으로 특정한 캐릭터보다 자신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다기보다, 저를 움직이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어요. 평범한 사람이 자기가 겪을 수밖에 없는 사건을 통해 도덕적인 갈등이나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지는 이야기들에 마음이 갑니다. 그런 이야기를 잘하는 감독이라면 다시 함께하고 싶어요.”
염혜란 배우. 에이스팩토리 제공
최근 그는 바쁘게 달려온 시간을 지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금은 조금 공부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이전 작품에서 제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돌아보고 있어요. 돌아보면 아쉬움과 후회가 쌓이기도 하지만, 저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염혜란에게 이번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은 경력의 끝을 장식하는 상이 아니다. 익숙한 어머니의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아라처럼 낯설고 불편하며 과감한 인물을 계속 만나라는 격려에 가깝다. “올해 좋은 일이 많았어요. 상의 의미를 너무 크게 붙잡고 있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작품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번 상은 분명히 특별합니다. 제가 아직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그 가능성을 봐줬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이니까요.”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