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9년 전 부산교육청 객관식 폐지 실험의 교훈
송지연 사회부장
국가교육위 수능 서·논술형 도입 추진
사교육 팽창과 AI 채점 둘러싸고 논란
서·논술형 수작업 채점 현실적 난관
2017년 부산서 초등 객관식 폐지 실험
일선 교육 현장 변화가 중요하다 일깨워
2017년 4월 말 김석준 부산교육감은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기자회견을 했다. 이듬해부터 초등학교에 객관식 시험을 전면 폐지하고 서·논술형 시험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부산교육청의 객관식 폐지 실험에 전국적인 관심이 쏟아졌고, 교육 현장에서는 찬반 여론이 극명하게 갈렸다.
초등학생들은 기본적인 지식이 중요하기에 어느 정도 암기와 객관식 문항이 필요하다는 반대 여론부터 4차 산업혁명 시대 창의력이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객관식 문항이 사라져야 한다는 의견까지 다양하게 쏟아졌다. 학부모들은 글씨가 엉망인 자녀가 혹여나 낮은 점수를 받아 기가 죽을까 걱정했고, 논술 학원에 보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당초 계획했던 전면 실시는 이뤄지지 않았다. 학교 현장의 준비 부족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당시 정책을 추진했던 담당 부서 관계자는 채점의 어려움이 컸다고 전했다. 초등학생들의 답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데 정답 기준을 세워 채점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채점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니 공정성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평가를 하려면 교육 과정이 바뀌어야 하고, 교사들도 바뀐 교육 과정에 맞춰 어떻게 가르칠지 연구하고 교육 받아야 했지만, 지역 단위 교육청에서 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고도 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가 지난 8월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서·논술형을 도입하고 AI로 채점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힌 후 교육계에 찬반 여론이 뜨겁다. 새로운 시험 형태의 등장에 사교육 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각계에서 엇갈린 이야기가 쏟아지자 당초 이달 말 예정됐던 중장기국가교육발전계획 시안 발표는 연내로 미뤄졌다.
수능 서·논술형 도입 논의를 지켜보며 9년 전 부산시교육청의 시도가 떠올랐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AI 환경이다. 정책 추진 배경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키워드가 AI로 바뀌었고, 기술적으로는 AI 채점이 가능한 환경으로 바뀌었다. 대학 서열화가 여전한 상황에서 ‘인생을 좌우한다’는 수능이 시험 대상이 되면서 해법의 난도는 더 높아졌다.
교육 현장에서는 수능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에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1994년 시행된 수능은 30년 가까이 운영되면서 특정 문제 유형들이 생겨나고 EBS 연계 비율이 높아지면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기출 문항의 풀이 요령을 잘 익히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학생들이 문제 풀이 기계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됐지만,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AI를 활용한 채점이다. 채점 업무 부담 경감과 채점의 정확성을 위해 AI 활용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AI 채점은 알고리즘 맞춤형 획일적인 답을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맞선다.
채점을 온전히 수작업으로 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당초 국가교육위원회가 서·논술형 도입 시기로 밝힌 2038학년도는 현재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대상이 된다. 전국의 초등학교 1학년 28만 8000여 명의 답안을 검토해야 하는데, 교사 1명 당 100명의 답안을 채점한다면 3000명 가까이 인원이 필요하다. 교차 검수와 과목별 채점을 감안하면 더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전국의 일반고등학교 교사 약 6만 명 중 상당수가 채점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공정성 시비는 차치하고 현실적으로 서·논술형 채점을 사람의 인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알고리즘 맞춤형 답이 양산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지만, 수작업으로 채점해도 채점 기준이 알고리즘 역할을 하기에 이를 AI 채점의 문제로 볼 수 없다.
수능 서·논술형 도입의 관건은 AI 채점 여부가 아니라 교육 현장의 변화이다. 9년 전 부산교육청의 경험이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 일선 교육 현장이 바뀌지 않으면 서·논술형 시험이 지향하는 가치를 교육에서 구현할 수 없다. 학생들의 다양한 답을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밀도 높은 채점 기준을 도출하는 데에 활용하고, 서·논술형 도입을 위한 교육 과정을 바꾸고 교사들도 그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목은 대학의 변화이다. 수능 개편이 일선 초중고 교육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수능 점수로 줄 세워진 학생을 손쉽게 골라 뽑는 현재의 입시 중심 교육 제도를 바꾸려면 대학의 책임은 더 강조되어야 한다. 입시 문턱을 낮추는 대신 대학별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고 졸업 요건을 강화하도록 정책적 유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