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이 무장간첩 때려잡은 다대포 사건의 진실[김백상의 레알 3편 1부]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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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다대포 무장간첩 초병들이 제압
대대적인 정부 발표 뒤에 실상은 고도의 첩보전
이중간첩, 특수부대 등을 총동원하고 감춘 진실

언제나 어디선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납니다. 일부만이 세상에 알려져 역사로 기록됩니다. 산업화 이후 부울경에서 벌어진 많은 일 중, 기억하고 되짚어야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기록합니다. 실화입니다만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극단적인 사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 [편집자 주]


1983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즈음, 부산 사하구 다대포 해안 백사장은 어둠에 잠겼다. 53사단 소속 이기건 병장과 김봉하 상병은 백사장 해안 매복 초소를 지키고 있다. 후방의 조용한 초소이지만, 두 병사는 해안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두 달 전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있었다. 군사적 긴장감이 높은 시기이다.

야간투시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기건 병장이 100여m 앞의 두 남자를 발견한다. 긴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살피며 다가오고 있다. 이 병장은 이들이 무장 간첩인 것을 직감하고, 다른 매복초소의 근무자들에게 견인줄로 신호를 보낸다. 전투준비를 하라는 경보이다.

괴한들이 50m 안으로 들어오자, 옷차림이 확인된다. 잠수복이다. 간첩이라고 확신한다. 괴한은 10m 앞까지 다가왔다.

그 순간 다른 매복 근무조가 쏜 조명탄이 터지며 주위가 환해진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이 병장과 김 상병이 동시에 총을 쏘며 초소 밖으로 뛰어나가, 간첩에게 돌진한다. 간첩들은 총알을 피했지만, 병사들이 휘두른 총기의 개머리판에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그대로 쓰러지지 않고, 병사들을 붙잡고 뒹군다. 육탄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간첩 한 명이 수류탄을 꺼내더니 “내 몸에서 수류탄이 터진다”면서 안전핀을 뽑는다. 본능적으로 이기건 병장은 달려들어, 간첩이 수류탄을 든 손을 풀지 못하게 붙잡는다. 간첩은 남은 한 손으로 이 병장의 얼굴 등을 가격하지만, 이 병장은 절대 놓을 수 없다. 수류탄이 그의 손에서 떨어지면 모두가 죽는다.

곧이어 다른 매복 초소의 장병들이 도착한다. 그들은 간첩들을 함께 제압하면서, 바닥의 수류탄 핀을 찾아내 수류탄을 해체한다.


다대포 무장 간첩 생포 당시, 간첩들이 입고 있던 의상.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다대포 무장 간첩 생포 당시, 간첩들이 입고 있던 의상.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약 5분 간의 격투가 끝났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간첩들은 만신창이가 돼 국군 초병들에게 생포됐다. 체코제 기관권총, 벨기에제 무성권총 등으로 무장했지만, 철통 경계 앞에선 무력했다

백사장에서 조명탄이 터지자,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5t급 북한 반잠수정이 빠른 속도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군 고속정 편대가 추격해, 승무원들과 반잠수정을 수장시켰다.

4일 오전 5시 30분 국방부 대간첩대책본부는 공식 브리핑으로 다대포 무장 간첩 검거 소식을 상세히 알렸다. 이기건 병장이 직접 언론과 인터뷰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상당 부분 국방부의 ‘시나리오’였다는 건 20년이 지나서 확인됐다. 경계에 성공한 병사들의 이야기는 신화였다. 진실은 복잡한 첩보전의 결과였다.


다대포 무장 간첩들 생포 직후 모습.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다대포 무장 간첩들 생포 직후 모습.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시작은 봉화 1호

남파 간첩 ‘봉화 1호’는 북한의 영웅이었다. 1928년생 충청북도 출신으로 6·25 전쟁 당시에 월북해, 북한에서 가정을 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을 잘 알고, 북한에 가족이 있어 당을 배신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그는 남파 간첩으로 선발되었다.

훈련을 마친 봉화 1호는 1960년 9월 경기도 화성군 노하리 해안으로 침투했다. 첫 임무는 지하 공작 거점 구축, 기초적인 탐색 업무 등이었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다.

두 번째 침투는 1978년 10월 경남 남해군 상주리 해안으로 이뤄졌다. 남한의 내부 정세를 파악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북한으로 돌아간 봉화 1호는 대남 정세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분석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 덕에 당시 대남 담당 총비서였던 김정일과 독대까지 하고, 그의 신임을 얻게 된다. 곧 공작원으로는 드물게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자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된다. 장관급에 버금가는 거물이 된 것이다.

봉화 1호는 1980년 4월 다시 남해군 상주리 해안으로 세 번째 남한 침투를 감행했다. 임무는 경주 불국사 등 전국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고정간첩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침투 전 ‘운하’라는 법명을 정하고, 불교와 승려 의례 교육을 마쳤다.

하지만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도 이미 봉화 1호의 존재를 파악하고 주시하고 있었다. 침투 5개월 만인 9월, 안기부가 그를 체포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잡힌 봉화 1호는 곧 전향하고, 남한 정보 당국을 돕기로 한다. 이중간첩이 된 것이다.

그해 겨울 봉화 1호는 북에게 “복귀시켜 달라”는 위장 무전을 쳤다. 이에 북한은 공작선을 보냈지만, 기다리고 있던 해군에 의해 격침된다. 이 사건으로 북한 내부에서 봉화 1호의 변절 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남한의 해군 레이더망에 걸렸다”는 봉화 1호의 후속 보고를 믿었다. 봉화 1호는 이후에도 안기부와 함께 거짓 정보를 흘리며, 이중간첩 역할을 이어갔다.

1983년 10월 9일 북한 정찰국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비상이 걸린 당국은 국제사회에 북한의 도발 실상을 보여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작원들을 생포해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국제사회에 들려주겠다는 게 목적이었다.

봉화 1호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이미 남한에서 평범한 사회인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북한은 승려로 위장해 포섭 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봉화 1호는 “모은 자료를 전달하고 활동 중인 다른 고정 공작원을 북으로 복귀시키겠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전달했다.

철썩같이 봉화 1호의 말을 믿은 북한은 공작원인 전충남, 이상규를 반잠수정에 태워 접선 장소인 다대포 백사장으로 보냈다. 그러니 군은 다대포 백사장에서 무장간첩을 발견한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봉화 1호라는 명칭은 3차 침투 전 북한의 공작 지도부가 그에게 부여한 공작 대호, 신상 보안을 위한 일종의 별명이다.


부산 다대포 해안으로 침투한 간첩들의 노획품 전시 현장.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부산 다대포 해안으로 침투한 간첩들의 노획품 전시 현장.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초병은 HID였다.

간첩 전충남, 이상규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53사단 초병들이 아니었다. 육군 정보사령부 산하 대북 특수임무부대인 ‘설악개발단(HID)’ 요원들이었다. 흔히 북파공작원이라 불린다. 20세기엔 존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던 이들이었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요원들의 증언 등을 모아보면, 11월 초부터 30여 명의 HID 요원들이 강원도 고성 모래사장에서 특수 훈련을 반복했다. 백사장에 매복해 있다가, 대항군을 순식간에 덮쳐 생포하는 훈련이었다. 비누와 치약 사용도 금지됐다. 혹시나 인위적인 냄새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전 중 사망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12월 2일 육군 정보사령부 부산지사로 이동했다. 다음 날인 3일 일찍부터 조를 나눠 매복했다. 모래로 완전히 몸을 덮어 가리는 조도 있었고, 해안 화장실에 숨은 이도 있었다. 그 요원은 재래식 화장실 변기 아래 공간에 직접 들어가 몇 시간을 매복했다고 한다.

HID 요원들에게 지급된 건 박달나무 몽둥이, 대검, 수갑 같은 것들이었다. 생포 작전이었기에 총은 없었다. 무장간첩을 상대하기엔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오후 10시 30분 즈음 해안가 화장실 부근에서 육탄전이 시작됐다. 간첩들이 매복지 부근을 지날 즈음, HID 요원들이 덮쳤다. 놀란 간첩 전충남이 총을 난사했다. 총을 쏜 것은 우리 군이 아니라 간첩들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요원들은 맞지 않았다.

이때 전충남이 “상규야, 수류탄 까”라고 외쳤다. 이상규가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았다. 그리고 팔을 뻗어 수류탄을 던지기 직전, HID 요원이 순식간에 몸을 날린 뒤 겨드랑이에 이상규의 팔을 끼우고 양손으로 수류탄을 쥐고 있는 주먹을 붙잡았다. 이상규가 저항했지만, 주변에 매복해 있던 요원들이 도착해 완전히 제압할 때까지 자세를 풀지 않았다.

생포 작전은 완벽히 성공했다. 몇 분 사이의 일이었지만, 간첩들의 얼굴이 망가질 정도로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제야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대들이 조명탄을 쐈다.

총성이 들리고 조명탄이 터지자, 다대포 해안선 300m 지점에서 대기하던 반잠수정은 작전 실패를 직감했다. 추격을 교란하기 위해 로켓포 4발을 해안 초소 방향으로 쏜 뒤 영도 외해로 도주했다.

그러나 이미 하늘에는 전투기가 떠 있고, 해군 고속정 편대 등이 대기 중이었다. 우리 군은 도주 중인 반잠수정을 정밀 포격하기 어렵다고 보고, 고속정으로 들이받아 파괴하는 작전을 펼쳤다. 밤 11시 6분경 부산 영도 남방 9km 해상에서 반잠수정은 충돌 충격에 그대로 수장됐다.

사건 발생 128일 만인 1984년 4월 9일 반잠수정은 인양됐다. 당시 북한 승조원 3명이 타고 있었는데, 2명의 시신은 순차적으로 발견됐고 1명은 실종됐다. 시신이 바다에 떠내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대포 무장 간첩 생포 당시 간첩들이 이용한 반잠수정을 인양하고 있다.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다대포 무장 간첩 생포 당시 간첩들이 이용한 반잠수정을 인양하고 있다.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성공한 작전, 냉정한 남북

근무 중인 사병들이 무장 간첩을 육탄전으로 잡았다는 건 돌아보면 의심을 살 만한 이야기다. 이기건 요원이 53사단 병사 옷을 입고 인터뷰를 할 때, 53사단 관계자들은 저런 병사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법도 했다.

하지만 정보 당국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다대포 해안 무장간첩 검거를 초소 병사들의 공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당연히 철저한 보안 조치는 이중간첩 봉화 1호를 보호하기 것이었다.

봉화 1호는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고, 훗날 이 때문에 남북이 충돌하며 사상자가 나오는 비극도 생겼다. HID는 작전에 성공하고도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요원들은 신분을 숨겨야 하기에,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결국 20년 뒤 다대포 무장 간첩 생포 작전의 진실을 알리려 전직 요원들이 직접 움직였다.

다대포에서 생포된 간첩 전충남, 이상규는 전향해 한국에 적응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봉화 1호를 비롯한 생포 간첩들은 북한의 가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대포 무장 간첩 검거 뒤의 이야기와 관련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냉전 시대의 논리를 목격할 수 있다.

-2편에서 계속-


<주요 참고 문헌>

부산일보 <수류탄 투척순간 아군장병이 덮쳐> 1983. 12. 04

중앙일보 <83년 다대포 간첩, 북파공작원들이 잡았다> 2003. 9. 24

월간조선 <무장 공작원 김동식씨의 체험적 대남 공작기> 2013. 6. 18

김동식 자서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2023. 04. 11

유튜브 주라벨TV <정부에 의해 대규모로 hid가 무장간첩으로 희생될뻔한 사건> 2020. 11. 20 등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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