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환자’ 낙인에 최장 542일 ‘암흑방’… 조선인 13명도 갇혔다 [이중의 억압 재일한센인]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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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징용·격리 그리고 감금

중감방 설치해 한센인 93명 감금
치료 대신 하루 두끼, 23명 옥사
소장 징계·검속권에 자의적 감금
조선인 입소 경위 규명은 숙제로

지난 2일 일본 군마현 중감방자료관에 재현된 특별병실(중감방)의 내부 모습. 지난 2일 일본 군마현 중감방자료관에 재현된 특별병실(중감방)의 내부 모습.

김○○, 203일, ‘모르핀 중독’.

선○○, 542일, ‘도주벽’.

김○○, 236일, ‘장품 판매’.

일본 내 한센병요양소에서 온갖 이유로 ‘불량환자’라는 낙인이 찍힌 한센인들은 요양소 안에서도 또다시 격리됐다. 군마현 국립한센병요양소인 구리우라쿠센엔에 설치됐던 감금시설인 ‘특별병실’, 일명 ‘중감방’이다.

1938년 설치된 이 시설에는 9년동안 93명이 갇혔고, 이 가운데 23명이 옥사했다. 〈부산일보〉 취재진이 중감방 수용자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한 결과, 이곳에 갇힌 조선인도 13명에 달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2일 군마현 중감방자료관. 당시 특별병실에 재현해 놓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었다. 입구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이른바 ‘개구멍’ 같은 문을 통과하자 2평 남짓한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가까웠다.

천장에는 전등갓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지만,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쪽에는 구덩이를 파 놓은 수준의 변소가 있었다. ‘병실’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치료는 이뤄지지 않았다. 식사는 하루 두 차례, 매실절임과 주먹밥 정도가 전부였다.

해발고도 약 1200m에 자리한 이곳은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살을 에는 추위지만 난방시설조차 없었다. 한 방에 최대 3명이 함께 갇히기도 했다.

중감방자료관의 쿠루 카즈히사 학예원은 “요양소에 있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듯한 느낌인데, 그 안에서도 더 혹독하게 취급받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본보가 확인한 자료는 중감방 수용자와 관련한 유일한 자료인 ‘쇼와 14년(1939년) 특별병실수용부 발췌’ 필사본이다. 여기에는 수용자들의 이름과 입·퇴실 연월일, 구류기간, 비고란에 적힌 구류 사유, 사인 등이 기록돼 있다.

이 자료에서 한국식 성 씨를 가진 조선인 수용자는 13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해방 전인 1940~1943년 사이 중감방에 구류됐다. 구류 기간은 짧게는 31일, 길게는 542일에 달했다. 가장 오랫동한 갇힌 조선인은 선 모 씨였다. 무려 542일 동안 구금됐고, 기록된 사유는 ‘도주벽’이었다.

조선인 수용자 가운데 옥사한 것으로 기록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출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진 이들도 있었다.

‘장품 판매’를 이유로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236일간 갇힌 유 모 씨는 출소 39일 만에 폐렴으로 숨졌다.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하다 ‘모르핀 중독’이 구류 사유가 된 김 모 씨는 203일간 감금된 뒤 출소했지만, 64일 만에 숨졌다.

쿠루 학예원은 한센병 환자들의 모르핀 사용을 일반인의 ‘일탈’이나 ‘범죄’와 동일 선상에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센병 후유증으로 신경통이 심한 사람이 아주 많고, 당시에는 진통제로 모르핀 같은 약도 비교적 쉽게 쓸 수 있었으니 통증을 줄이려다 중독 증상이 생기는 것”이라며 “그러다 조금 난폭하게 굴면 귀찮으니 가둬버린 것인데, 실제로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부연했다.

중감방에 갇힌 환자들이 실제로 수용부에 기록된 ‘죄’를 저질렀는지도 의문이다. 다른 입소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입소 경위가 확인된 일본인 수용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구금 사유가 터무니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강제노동인 ‘환자 작업’으로 세탁을 담당했던 한 입소자는 요양소 직원에게 장화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감금됐다. 또 다른 입소자는 도난된 자전거를 부주의하게 구매했다는 이유로 549일 동안 갇혔다. 중감방 전체 수용자 가운데 최장 구류기간이다. 하지만 수용부에는 그의 구금 사유가 ‘도박’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처럼 자의적인 처벌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요양소장의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1916년부터 일본의 한센병요양소장에게 징계· 검속권이 주어지면서, 소장의 ‘입맛’에 따라 환자를 처벌하고 감금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식민지에서 건너온 조선인 한센병 환자들은 요양소 안에서도 ‘을 중의 을’ 에 가까운 처지에 놓였던 만큼 일본인 환자보다 한층 가혹한 처분을 받았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이들이 왜 중감방에 갇혔는지 구체적인 경위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중감방자료관은 수용자의 입소 경위를 보여주는 증언이나 기록이 새롭게 발견되면 전시된 수용자 이름 옆에 그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13명의 조선인 수용자 이름 옆에는 아직 아무런 설명 없이 ‘빈 칸’으로 남아 있다.

쿠루 학예원은 요양소 속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중감방에 갇힌 조선인들의 구체적인 사연을 밝히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용자 중 조선인이 많다던지, 기독교인이 많다던지, 여성도 들어왔다는 사실을 보면, 중감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요양소에서 특히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찾느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일부러 빈 칸으로 남겨두고 계속 찾아가는 것입니다.”

중감방자료관에 남겨진 ‘빈칸’은 단순히 기록의 공백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센병요양소에서 조선인 환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스러져갔는지를 밝히기 위해 앞으로 채워야 할 역사의 공백이다. 군마(일본)/글·사진=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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