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서사 없는 영화의 즐거움
영화평론가
설명 대신 감각, 이야기 대신 생존 체험
공간 변화로 완성되는 밀도 높은 액션
해답을 찾는가, 낯선 경험을 원하는가
영화 '호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편의 영화를 보고도 반응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인생영화라며 감동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도대체 왜 이렇게 호평이지?”라며 고개를 갸웃한다. 지난주 강의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갔다. 한 수강생이 영화 ‘호프’를 두고 답답함 섞인 혹평을 쏟아 냈다. 함께 극장을 찾은 딸은 인생영화라며 눈을 반짝였지만, 정작 본인은 러닝타임 내내 지루함을 견디느라 고역이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단순한 불평이라기보다,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엇갈린 평가를 받는지에 대한 솔직한 질문처럼 들렸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는 서사, 그러니까 이야기가 탄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어리둥절한 영화다. 영화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일이 벌어지는 순간의 감각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의 배경은 비무장지대와 맞닿은 외딴 산골 마을 호포항이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커다란 소 한 마리가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처음엔 호랑이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정체불명의 존재가 벌인 일임을 알게 된다. 이제 출장 소장 범석(황정민)과 주민들은 단 하루 동안 그 존재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호프’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왜 나타났는지, 공간이나 시대 배경 등의 친절한 설명이나, 사건의 전말을 차근차근 밝혀가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인물들이 알 수 없는 공포와 마주하는 순간,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추격과 생존의 감각을 체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호프’는 미스터리라기보다 재난영화에 가깝고, 재난영화라기보다는 거대한 생존 체험에 가까운 영화다.
문제는 많은 관객이 영화를 ‘이야기’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따라가고, 복선을 회수하며, 마지막에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경험에 익숙하다. 하지만 ‘호프’는 그런 기대를 의도적으로 비껴간다. 이 영화가 원하는 것은 추리가 아니라 감각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따라가는 대신 공포를 함께 견디고, 답을 찾기보다 살아남는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사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허전하게 남고, 감각의 밀도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압도적인 경험으로 기억된다.
그 체험을 완성하는 것은 당연히 액션이다. 감독은 똑같은 액션을 반복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3개의 공간에서 숨 막히는 액션을 보여주는데, 먼저 영화 초반부 마을에서는 좁은 골목과 건물 사이를 누비는 복잡한 추격전이 펼쳐지고, 숲에서는 빽빽한 나무와 어둠 속에서 방향감각마저 잃게 만드는 생존 액션이 이어진다. 마지막 도로에서는 거침없는 속도감의 카체이싱으로 긴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같은 추격 장면이라도 공간이 달라질 때마다 액션의 리듬과 감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덕분에 긴 러닝타임에도 영화는 좀처럼 같은 호흡을 반복하지 않는다. 마치 서로 다른 세 편의 액션 영화를 연달아 보는 듯한 밀도와 스케일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연출은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전작인 ‘추격자’가 숨 돌릴 틈 없는 추격으로, ‘황해’가 끝없는 도주와 생존으로 관객을 몰아붙였다면, ‘호프’는 그 방식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의 대결로 확장한다. 설명보다 체험, 해석보다 감각을 앞세우는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호프’는 누구에게나 추천하기 쉬운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반드시 ‘잘 짜인 이야기’로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가. 명쾌한 해답인가, 아니면 몸으로 기억하게 되는 경험인가. ‘호프’는 바로 후자를 선택한 영화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