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572> 낙동강 에코트레일 14. 고령 개호정~창녕 적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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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물억새, 눈이 아리다

물억새가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수묵화를 그린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도 불었다. 우곡생태공원 가운데로 난 에코트레일을 지날 때엔 가을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초추의 양광이 길 위에 떨어진 도토리 위에 머문다. 반짝인다. 독일 수필가 안톤 슈낙의 수필과 달리 이런 풍경이 슬프지는 않다. 고령 개경포 너울길에서 만난 가을이다. 활짝 핀 물억새가 푸른 화선지 위에 붓을 쓸어내리듯이 그림을 그린다. 우곡교 아래 넓은 초지에서 보았다. 가을이다. 눈이 아릴 듯이 아름다운 풍경은 늘 강 곁에 있다. 낙동강 에코트레일 14구간에서 마침내 계절의 문을 열고 가을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너울너울 개경포 너울길

개경포를 굽어보는 고령 개호정에서 14구간 낙동강 에코트레일을 시작한다. 초가을의 아침 햇살이 정자를 비춘다. 개호정에서 부례관광단지까지 약 4㎞ 남짓 구간은 개경포 너울길로 조성해 놓았다. 옛 사연을 알기라도 할 듯한 아름드리나무가 먼저 반긴다. 개호정에서 시작하는 에코트레일은 출렁다리~부래정~들꽃마을 영성관~우곡생태공원 둔치길~우곡교~대구·경남 경계~무심사 임도~우산목장~합천창녕보 매점~등림개비리길~양수장~적포교까지 28.6㎞를 긴 점심 시간을 포함해서 10시간 남짓 걸었다.

아름다운 풍경은 늘 강 곁에 있어
길 가 도토리 깨무니 떫은 고소함이
동요 '산토끼' 마을선 옛 추억 아련
개비리길 끝나니 반딧불이가 마중


개호정에서 우곡교까지는 MTB도로가 개설돼 있다. 12㎞ 정도로 꽤 길다. 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르내림이 심하기 때문에 새로 조성된 개경포 너울길은 도보 여행자에게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의 도토리가 길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다. 최근 이런 도토리를 싹쓸이해가는 얌체족이 많다고 한다. 도토리를 먹이로 하는 멧돼지가 결국 민가로 내려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다. 야생동물의 몫이니 제발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 도토리에 사는 거위벌레의 애벌레는 또 새들의 먹이이니 사람이 도토리를 양보하면 자연이 행복하다.

하지만 심어서 거두지 않은 알밤을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하나를 깨물었다. 떫은 맛 뒤에 고소함이 몰려왔다. 오디 열매와 버찌 이후에 처음 먹어보는 자연의 선물이다.

귀한 미루나무가 강변에 파수병처럼 서 있다. 이곳 너울길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왜적을 무찌른 전승지이기도 하다니 나무에 의병의 혼이 깃든 것처럼 늠름했다. 가족형 관광지로 한창 개발 중인 부례관광단지를 지나 부래정에 오른다. 부래정은 임란 때 의병장 박정번 선생이 1603년 지은 정자다. 전쟁이 끝났지만 혹 왜적이 강을 타고 오르는지 감시할 요량으로 뜰 부(浮)자에 올 래(來)자로 정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외딴곳에 있는 작은 교회와 양계장을 지나니 절벽에 난 도로엔 공사가 한창이다. 올해 8월 완공 목표라고 돼 있으나 무슨 일인지 이제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분주한 현장을 지나자 강폭이 넉넉해지면서 그림 같다.

■우곡 지나니 무심사 임도

외진 곳에 웬 커다란 건물이 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운영하는 노숙자 재활시설 '들꽃마을'이다. 조금 더 가니 작은 성당과 영성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인근 장애 학생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받는 모양이다. 최근 대구 희망원 사태 등 구설수가 많아서인지 외부인을 경계하는 눈치다. 하얗게 지은 성당은 순수미를 뽐내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들꽃마을에 있는 작은 성당
영성관을 지나 둑길로 접어드니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진다. 강가에 핀 물억새가 손을 들어 어서 오라고 유혹하고 있다. 그 희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빠져든다. 우곡 생태공원이다. 오래전 4대강 공사를 할 때 세웠음이 분명한 각종 안내판은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졌다. 그러나 어김없이 핀 억새는 아름답다. 우곡교까지 가을 정취를 흠뻑 느끼며 걸었다.

우곡교를 건너 마침내 경남 도계로 들어섰다. 창녕이다. 인근 '산토끼 마을' 이방면 소재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방면은 동요 '산토끼'의 산실이어서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점심 후 무심사 임도를 오른다. 무심사 임도는 가팔라 국토종주 자전거 라이딩을 하는 이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반면 풍경은 아름다워 행정자치부가 정한 '국토종주 자전거길 20선'에 들었다. 임도 산마루에 올라서자 잘 자란 오동나무가 속에 든 거문고를 울려주었다.

강 건너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는 합천 오광대의 발상지다. 우포늪 가수 우창수 씨와 함께 있는 합천 밤마리 오광대 단원을 이날 점심 자리에서 만난 것은 우연치고는 신기했다.

임도 내리막엔 우산목장. 소똥 냄새가 지독했다. 대량 사육의 폐해지만 한우를 즐기는 소비자들이 많은 까닭에 감히 얼굴을 찌푸리지도 못했다. 합천창녕보가 보였다. 자전거 길은 이 보를 넘어 다시 합천 땅으로 넘어가지만 도보 여행자는 그냥 가도 된다. '개비리길'이 있어서다.

길을 버리고 길을 찾다

합천창녕보 쉼터에서 창녕군의 길 안내판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함께 걸은 낙동강하구 기수생태계 복원협의회 최대현 사무국장은 "등림개비리길은 몇 년 전 답사를 했을 때는 길 찾기가 모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내판에 지도까지 그려져 있으니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창녕군 관광안내소로 전화를 걸었다. 안내원은 "안 가시는 게 좋겠다"고 점잖게 자전거길로 우회할 것을 권했다.
합천창녕보 인근에서 본 거대한 모래채취선.
개비리길이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비리길은 '개가 다니면서 만든 길'이라는 의미와 '험한 벼랑길'이라는 의미가 함께 있으니 말 그대로 잘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의 오솔길이다.

하지만 도보여행자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등림개비리길을 택했다. 좋은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기로 한 것이다. 등림마을까지는 길이 좋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산이 가로막았다. '사미헌 장선생의 비'가 있는 곳에서 개비리길이 시작됐다.

숲이 짙어 길이 희미했지만 더 큰 문제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해가 많이 짧아져서 이미 낙동강은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먼지가 잔뜩 앉았지만 길을 낸 사람이 걸어놓은 '낙동강 명품길'이라는 노란 리본이 있어 길잡이 역할을 톡톡하게 했다. 몇 굽이를 돌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계곡을 만나면 산 위쪽으로 붙어야 하고, 곶을 만나면 최대한 강 쪽으로 서야 길이 있었다. 마침내 동네의 가로등이 보였다. 양수장을 지나 창녕군 이방면 현창리에 접어들었다. 둑길에 반딧불이가 마중을 나왔다. 신비한 풍경이었다. 긴 둑길을 지나 적포교에 도착했다. 주위는 온통 깜깜했다. 온종일 우리와 함께 걸어온 적포교 아래 낙동강도 피곤해 이제 막 쉴 참인지 고요했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취재 협조=낙동강유역환경청

▲ 낙동강 에코트레일 14구간 고도표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낙동강 에코트레일 14구간 구글어스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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