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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북항, 춘래불사춘 퇴치법
부산에게 부산항은 무엇인가?
부산과 부산항을 향한 근원적 물음이다.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된 과정은 대략 이렇다.
부산항 없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부산에는 왜 변변한 부산항박물관 하나 없을까. 2007년 기본계획 고시부터 거의 20년이 다 돼 가는 북항 재개발지역은 왜 허허벌판일까. 부산역 뒤 충장로의 어지럽고 울퉁불퉁한 도로는 도대체 언제 깔끔하게 정비될까.
2020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이 분야 취재를 맡은 기자는 바뀌지 않는 부산항을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다 근본적 의문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안 바뀌나.’
북항 재개발 1단계 사업은 2022년 연말 기반시설 조성 공사가 마무리됐다. 분양 대상 부지와 도로, 공원 등이 완성됐고, 친수공원도 부분 개방했다. 탁 트인 바다와 거대한 부산항대교를 부산역 바로 앞에서 조망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며 시민들은 달라질 북항의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북항 재개발사업은 거의 중단 상태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조사가 이어지면서 사업 시행 주체인 부산항만공사(BPA)가 잔뜩 움츠러든 것이다. BPA 내부에서는 재개발 담당 부서가 최대 기피 부서라는 얘기도 들린다. 감사·수사에 따른 징계가 이어진 이후, 이 업무를 맡는 BPA 직원 입장에선 최대한 방어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BPA도 감사 대상 기관이기에 법규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위법한 사례가 있다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전례 없는 최초의 항만재개발사업을,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접목한 공기업이 담당한다는 점을 감사원이 얼마나 반영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자율을 부여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만으로 특혜와 불법의 올가미를 덧씌운 것 아닌가 곱씹어볼 일이다.
감사 이후 BPA는 땅을 분양받은 기업들에게 감사원 지적 그대로 ‘애초 사업계획대로 속히 착공하라’는 요구만 앵무새처럼 되뇌지만, 기업들은 거의 한목소리로 ‘10년 전 보름 만에 후닥닥 만든 사업계획안대로 무조건 착공을 독촉하는 것이 과연 사리에 맞느냐’고 하소연한다. 분양부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이 안 된 상태라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착공을 미루게 하는 요소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간 부문이 투자를 하려면 공공이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 그럼에도 애초 해양수산부와 BPA, 부산시 등 관련 기관과 공기업들이 북항을 채우겠다고 약속한 공공 콘텐츠는 기약이 없었다. 겨우 북항마리나만 문을 열어 수영장과 다이빙풀을 운영 중일 뿐, 오페라하우스는 여전히 공사 중이고, 단일 부지로 가장 넓은 랜드마크 부지는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중앙역부터 북항을 관통하는 트램 계획도 아직 계획에 멈춰 있다. 부산항박물관, 연안유람선터미널 부산항역사관 등도 마찬가지다. 땅만 만들었을 뿐, 시민 발길을 끌어들일 공공 콘텐츠와 인프라를 조성해야 할 공공의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만만한 민간 기업만 옥죄는 형국이다. 지난해까지 범정부 역량을 모아 희망을 걸었던 2030월드엑스포 유치가 무산되면서 엑스포 무대로 삼으려던 북항의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최근 콘텐츠를 개편한 북항 재개발 홍보관을 찾은 날은 초봄답지 않게 바람이 차가웠다.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옛말이 떠올랐다. 한낮 북항 일대는 겨울과 봄 사이 변덕과 혼돈 속에서도 평온했다.
더디긴 해도 BPA는 북항 공공 콘텐츠의 기능과 규모에 대한 용역을 올 상반기까지 마무리 짓고, 하반기부터는 각 시설에 대한 설계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용역 대상은 △IT영상지구 내 문화공원에 시민이 원하는 교양시설(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과 편의시설 설치 △연안여객터미널 리모델링 후 부산항기념관 조성 △유·도선장 적정성 검토 △북항마리나와 연계한 해양레포츠콤플렉스 조성 △재개발지역 내 교통체계 검토 및 개선안 마련 △현 BPA 부지 주변 연안유람선터미널 기본구상 수립 등이다.
내년이면 역사적인 부산항 개항 150주년이다.
오지 않는 봄을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다. 공공부문이 먼저 마중물을 신나게 부으면 활기는 살아난다. 때마침 북극항로니, 미국 해군함정 MRO(유지 보수 정비)·신조 추진이니 등 기대를 갖게 하는 소식이 잇달아 들린다. 한국 산업화의 견인차였던 부산과 부산항의 다가올 150년을 위해서라도, 과거와는 다른 열정과 추진력이 필요한 시기다.
2025-03-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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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우리도, 그들도 애국자"
어느 대통령의 마지막 대국민 담화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는 전혀 새로울 게 없습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우리가 건국 이래 최악으로 분열됐고, 그로 인해 위기에 취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진영 간 극한 투쟁으로 적색 경보가 울리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닌 우리의 잘못입니다. 저 또한 문제의 일부임을 인정합니다. 변화가, 대담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주주의는 황혼처럼 저물어 갈 것입니다. 오늘 서로에게 약속 하나 합시다. 우리끼리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지 말고, 조금이라도 공동의 선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자는 약속 말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민주주의를 구할 수 없지만, 신뢰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면 그 또한 민주주의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다음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을 눈앞에 둔 윤석열 대통령이 이 메세지를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12·3 비상계엄’ 이후 극한으로 갈라진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안심과 위로를 주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쉽게도 ‘홈랜드’라는 한 미국 드라마의 대사를 조금 각색한 것이다. 극 중 대통령은 가진 권한을 총동원해 음모론과 가짜 뉴스로 정권을 흔드는 반대파들을 응징하려 하지만, 결국 보복의 악순환만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국민 통합을 호소하며 ‘하야’한다.
반면 현실의 대통령은 ‘야당 경고용’이라며 계엄이라는 엄청난 칼을 휘둘렀지만, 헌재 선고가 임박한 지금 이 순간에도 권좌로의 복귀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탄핵에 찬성하는 절반 이상의 국민들은 “계엄에 실패한 대통령이 다시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어이없어 하다 못해 공포감을 호소하고, 광장의 결집 이후 지지율 상승과 ‘석방’이라는 반전을 본 탄핵 반대 진영은 “이제 곧 대통령이 용산으로 돌아가 못다 한 종북좌파 척결을 끝낼 것”이라고 믿는다. 이 거대한 인식의 간극을 메울 방법이, 아니 두 진영의 공존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 암울한 의문이 커지는 요즘이다. 양측이 뿜어내는 증오와 적의의 에너지는 한 궤도에서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맹렬하고 무모해 보인다. 우리 민주주의 또한 중대한 위기 국면이고,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현 시점에서 충돌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가장 긴요한 건 ‘당사자’들의 결자해지 의지다. 여야에서 최근 앞다퉈 요구하듯이 윤 대통령은 ‘파면’ 결정이 나더라도 승복할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만에 하나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나머지 임기는 국정 운영보다는 조속한 개헌에 집중하겠다는 ‘최후 진술’을 다시 확약하는 것도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역할도 윤 대통령 못지 않다. ‘줄탄핵’과 ‘입법 독주’로 윤석열 정부를 내내 흔들었던 거대 야당의 무절제한 힘 자랑에 대한 자성과 변화를 약속한다면 보수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거대 야당이 행정권력까지 손에 쥘 경우 어떤 ‘폭주’가 있을지 우려하는 많은 국민들에게 진정성 있는 답을 내놓은 것도 차기 권력을 꿈꾸는 이의 마땅한 자세일 터다.
둘로 쪼개진 광장의 시민들 또한 한 치의 접점이라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텐데, 그 출발점은 ‘사실(fact)’에 대한 존중이지 않을까. 일례로 ‘중국 간첩 99명 체포’와 같이 명백하게 허위로 드러난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겠다.
내전이 운위되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참으로 한가하고 공허한 얘기로 들린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달리 다른 방법이 있을까. 스스로가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의 피해자인 〈미스빌리프〉(misbelief·잘못된 믿음)의 저자 댄 애리얼리 교수가 이를 신봉하는 이들을 깊숙이 접촉하고 연구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상대한 대한 조롱과 무시보다는 이해와 공감하려는 노력이었다.
며칠 뒤 우리 사회는 한 차례 큰 소요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광기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양 진영 모두 숨을 고르고 이성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테다. 대통령이 복귀해서, 반대로 야당이 집권해서 ‘반대 세력’을 다 쓸어버리면 평화의 시간이 올까?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얘기다. 2008년 미 대선 당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는 상대인 민주당 오바마 후보를 ‘아랍인’이라고 공격하는 지지층을 향해 “그는 훌륭한 미국인이다. 나와 정책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이라고 자제시켰다. 그런 최소한의 존중과 절제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변화다. 사실 계엄 이후 핏대 세우면서 논쟁하고, 길거리까지 나선 우리 모두 결국 나라 잘 되기 위해 나선 애국자들 아닌가.
2025-03-1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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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도자기가게 코끼리를 우짤꼬?
독일 속담에 ‘도자기상점에 들어간 코끼리’라는 말이 있다. 덩치 큰 야생코끼리가 귀한 상품들이 가득 진열된 도자기상점에 들어가 돌아다닌다. 코끼리가 움직일 때마다 부딪쳐 도자기들이 부서진다.
2기 행정부를 시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즘 행보가 저 속담 속 주인공 같다. 취임 전부터 떠들썩했고 취임 후 전세계 곳곳에 대놓고 트집을 잡고 있다. “그린란드·파나마운하·캐나다를 미국땅으로 편입해야 한다” “멕시코만은 미국만으로 바꾸겠다” 등 발언이 거침이 없다. 여기까지는 한국에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관세 카드’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직격탄이다.
미국 정부는 12일부터 한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다음 달엔 한국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에 관세를 물릴 방침이다.
이 같은 미국의 으름장은 어느 정도 약발이 받는 모양이다. 백악관은 지난 10일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들이 관세로 인한 타격을 줄이기 위해 미국 시장으로의 진출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사례로 삼성전자와 현대차, LG전자를 다국적 기업 10여 곳과 함께 언급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고, 현대차의 경우 조지아주의 전기차 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가 지난해부터 시운전에 들어갔고 이달 말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기업들은 이 같은 현지화를 통해 미 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고 역내 점유율을 유지하거나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정부로서도 자국의 무역적자와 함께 미국 내 실업률를 낮추는 일석이조 효과를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노믹스의 통상정책은 무역적자 개선이 최우선 목표”라고 했다. 2023년 기준 중국의 대미수출 규모는 4272억 달러로, 미국의 대중 수출규모 1478억 달러의 3배에 달한다. 트럼프 통상정책의 주된 관심대상 국가는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의 한국 무역적자는 514억 달러 규모로 중국의 5분의 1 수준이다.
관세를 피해 미국 내 현지공장을 짓는 게 과연 정답일까. 지난해 미국 출장 중에 간 식당에서 경험한 물가는 한국의 2~3배 수준이었다. 통계치로 나온 미국 평균임금도 한국의 배가량 된다. 동남아나 남미 등 인건비가 싼 곳과 비교하면 더 큰 차이가 난다.
인건비가 싼 지역 대신 미국 내에서 제품이 만들어진다면 가격은 수입 제품보다 더 높아질 수 있다. 미국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미국산 TV나 자동차를 사게 된다. 이로 인해 소극적인 구매로 이어져 결국 경기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렇게 해서 최근 생겨난 신조어가 ‘트럼프 리세션’(경기후퇴)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불을 댕긴 관세 전쟁이 제 발등을 찍어 상대국은 물론 미국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부메랑이 될 것이란 얘기다.
실제 미국 경제성장률을 실시간으로 추정하는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지디피나우(GDPnow)는 지난 6일(현지 시간) 올해 1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을 -2.4%(전기 대비 연율 기준)로 제시했다. 지난 2년여 동안 나홀로 성장을 이어온 미국 경제가 트럼프의 관세·이민 정책으로 후퇴할 것이란 우려가 커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기 침체 전망에도 “큰일에는 과도기가 있다”며 다음 달 2일부터 미국의 모든 무역 상대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될 경우 올해 한국경제 성장률은 최대 0.62%포인트 하락하고,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인 제조업 위축으로 관련 산업 부진과 양질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의 대응 카드는 없을까. 벌써 캐나다와 중국 같은 대국들은 미국을 겨냥해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맞불작전을 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선 아직 그런 얘기가 없다. 자동차, 반도체 등을 수출하는 국내 그룹 총수들은 트럼프 대통령 아들, 실세 등에 줄대기 바쁜 모습이다. 미국 내 한국 기업의 대관 담당 인력도 보강하고 있다. 맞대응 해봐야 손해만 더 커진다며 피해 최소화 분위기다.
최근 국방, 조선, 반도체, 한류 등으로 국격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인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 한국은 아직도 올라갈 ‘산’이 많아 보였다.
2025-03-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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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멸종 위기의 도시' 부산과 해운대신도시
저출산 현상의 고착화로 학령 인구 감소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부산을 대표하는 신도시로, 주거와 교육 여건이 좋기로 알려진 해운대신도시(해운대 그린시티) 내에 있는 몇몇 초등학교가 가까운 미래에 통폐합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출산과 청년 유출로 인한 학령 인구 감소는 원도심과 서부산 지역에 국한된 문제로 여겨졌지만, 부산의 전통적인 주거 선호 지역인 신도시 지역에도 엄습하고 있어서다.
해운대신도시는 1990년대 말 개발이 완료된 부산 최초의 계획도시다.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부족 해결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목표로 전국적으로 추진된 1기 신도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좌1~4동 4개 동을 아우르는 타원형 시가지에 아파트 단지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하며, 입주 초기 신혼부부 등 젊은 층이 대거 유입됐고, 우수한 학군과 편리한 생활 여건 등으로 주거 지역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랬던 해운대신도시에서 인접한 초등학교 2곳의 올 신학기 1학년 학급 수가 각각 3~4개 반에 불과하다고 한다. 앞으로 입학생 수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예상돼 두 학교 통폐합의 카운트다운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해운대신도시 내 또 다른 초등학교는 올해 1학년 학급 편제가 2개 반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역 맘카페에서도 해운대신도시 내 초등학교 1호 통폐합이 머지않았다는 건 이미 통설이다.
올해 폐교 대상 초등학교는 전국 38곳. 이 중 대부분이 도농복합지역이지만, 대도시(특별·광역시) 중에는 부산 2곳과 대구 1곳이 포함됐다. 부산은 원도심인 부산진구의 초등학교 2곳이 폐교하고 인근 학교로 통폐합됐다. 학교 통폐합 대상이 될 수 있는 부산 지역 소규모 학교(학생 수 240명 이하)는 매년 늘고 있고 있는데, 부산의 전통 주거 선호 지역이었던 해운대신도시도 이제 ‘남의 일이 아닌 일’이 된 셈이다.
기자가 10여 년 전 잠시 신혼 생활을 했던 해운대신도시는 잘 닦인 방사형 도로망과 근거리 다양한 상업 시설로 젊은 층이 매우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학원가가 잘 형성돼 있고, 유치원과 어린이집도 곳곳에 있어 교육과 양육 환경 역시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여차저차한 이유로 이사를 나왔지만, 아직도 해운대신도시에 살고 있는 지인들의 얘기는 그때와 사뭇 다르다. 한 지인은 “집값은 1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고, 오래된 아파트에 입주민 고령화도 심각하다”며 주변의 누구누구처럼 빨리 탈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넋두리를 늘어 놓는다.
그나마 남아 있던 해운대신도시의 청년들은 수도권으로 떠났고, 부산의 다른 지역에 재정착을 하더라도 마린시티와 센텀시티를 비롯해 해운대구청 인근 상업 지역에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로 옮겨 가면서 해운대신도시의 쇠락은 가속화되고 있다.
얼마 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 세계 숱한 대도시 중 부산을 ‘멸종 위기의 도시’로 콕 집어 걱정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FT는 ‘멸종 위기:한국 제2의 도시, 인구 재앙을 우려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1995∼2023년 60만 명의 인구가 감소한 제2의 도시 부산에 대해 저출생과 고령화 등으로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서울 중심의 극심한 경제 집중 현상을 지목했다. 한때 부촌의 명성을 지녔던 해운대신도시의 쇠퇴는 FT가 지목한 부산의 위기가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해서 씁쓸하다.
부흥의 기회는 있다. 최근 정부는 해운대신도시 인근 53사단 부지의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부대를 재배치하기로 했다. 부산시는 그린벨트가 해제된 이곳에 첨단산업단지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시는 첨단 연구단지와 스타트업 기업, 녹지공간 등이 어우러진 해운대 첨단사이언스파크를 조성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청년 인구를 유입시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러한 계획이 현실화된다면 직주근접성을 갖춘 해운대신도시는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 올해 정부가 지방을 대상으로 노후계획도시특별법 대상지를 선정하는데, 해운대신도시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또 다른 기회다. 재건축이 급물살을 타면 청년층의 탈출 러시를 수그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청사진만 번듯하게 그려놓고 실현이 지지부진한, 그런 희망 고문만 계속돼서는 안 된다. 인구가 소멸하는 부산의 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너무나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멸종 위기의 도시’라는 오명을 씻어내고 인구 소멸을 막기 위해 정부와 부산시는 이들 역점 사업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 당장 지체 없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대성 사회부 차장 nmaker@busan.com
2025-03-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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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가벼운 입은 반자본주의
말 그대로 ‘카오스’다. 해양산업 동향을 나타내는 통계들을 들여다보거나, 관련 산업계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숫자와 말들 속에 깊은 불안감이 느껴질 때가 많다. 조선 관련 분야에선 오히려 기대감이 느껴진다. 분야별로 희비가 교차하고 있는 해양산업은 미국 트럼프 정부가 몰고 온 혼돈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지난달 말 글로벌 해상운송 항로 운임을 나타내는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1515.29을 기록했다. 1월 초 2505.17에서 연속 7주 하락했다. 14개월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SCFI는 세계 15개 노선의 운임을 종합해 계산한 지수로, 수치가 뚝뚝 떨어진다는 것은 운송비가 그만큼 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옮길 물동량이 없어졌으니, 해운회사들이 가격을 낮추고 있다는 뜻이다. 해운 회사의 불안감과 세계 경기의 둔화가 떨어지는 숫자에서 읽힌다.
해상운임의 하락은 계절적 요인으로 설명되지만, 빠른 속도의 추락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당연히 트럼프 정부의 영향이 크다. 트럼프는 캐나다, 멕시코, 중국을 넘어 유럽까지 전 세계와 관세 전쟁을 벌일 기세이다. 가뜩이나 경기 둔화가 우려되는데, 관세 전쟁 예고는 둔화를 침체로 바꾸었다. 관세의 실질적인 영향은 하반기에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공포스럽기도 하다.
반면 조선업은 요즘 매우 ‘핫’하다. 트럼프가 직접 ‘K조선’에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동맹국에서도 미국 군함 건조할 수 있는 법안이 추진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트럼프가 중국 선박에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발표로 반사이익 이슈도 있다. 이런 기류가 모여 조선업만큼은 트럼프 수혜주가 되었다.
사실 최근까지 조선업은 상당한 호황기였기 때문에, 곧 경기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 흐름을 트럼프 효과가 막은 셈이다. 다만 트럼프의 말과 약속에 기반한 기대가 정말 어느 정도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뱉은 말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힘은 막강하지만, 말은 매우 가볍다는 걸 지구인이라면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트럼프는 기존의 정치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극단적인 주장과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더욱이 직관적이면서 단순하게 쉽게 말한다. 상상하기 힘든 요구를 단순화해 힘 있게 주장하니, 상대는 주눅이 들기 쉽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행보를 두고 ‘광인전략’이라고도 한다. 고도의 계산된 행동이든, 원래 그런 캐릭터이든, 트럼프는 미치광이처럼 상대국에 겁을 주며, 세계 경제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캐나다, 멕시코를 상대로 한 관세 논란을 되짚어 보자. 중과세하겠다고 했다가, 직전에 유예했다가, 또 부과한다고 했다가, 다시 합의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제시한 10%, 25%, 50% 등의 수치는 면밀한 검토와 계산을 거친 것은 아닐 것이다. 숫자들은 논리적 결과가 아니라, 과세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수단에 불과하다. 논리적으로 꼭 필요했던 과세가 아니었으니, 쉽게 주장하고 접을 수도 있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트럼프의 이런 행보를 동맹 관계도 뛰어넘는 극단적 국익 우선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말이 가벼우면 신뢰를 잃기 마련이다. 화폐는 사실 신뢰의 산물이다. 소라 껍데기든, 종이 조각이든 어떤 물건에 특정한 가치를 주기로 약속을 하면서, 화폐가 생기고 경제가 시작됐다. 경제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신뢰의 가치는 더욱 커졌다. 안정적인 경제 기반에 대한 믿음이 생겨야, 기업과 정부들이 안심하고 투자를 이어갈 수 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시장이 믿음을 줄 때 개별 경제 주체들의 잠재력이 극대화된다는 건 자본주의 역사에서 입증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자본주의를 퇴보시키고 있다. 관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 논리적이지 못한 정책으로 글로벌 시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 본질적인 해악이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혁신을 하고 미래를 준비하겠는가. 본질적인 성장은 멀어지고 하루하루 버티기 바쁜 허약한 자본주의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국내 조선업도 위태로워지고, 미국 국민도 궁핍해진다. 당장 중과세로 수입품이 비싸지면, 미국 기업과 국민에도 타격이다. 사실상 과세는 수입품을 사는 자국민이 대신 내는 세금과 비슷하다. 국익 우선주의라고 부르기 힘든 정책이다.
트럼프 1기때에도 초기 광폭행보가 요란했지만, 대체로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의 트럼프는 더 ‘반자본주의’ 인물이 된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지만, 부디 그가 진짜 광인은 아니기를 바란다.
김백상 경제부 차장 k103@busan.com
2025-03-0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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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헌재 결정 승복'은 헌법에 대한 예의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취임 선서문이다. 취임 첫 마디가 헌법 준수인 만큼, 대통령은 헌법 수호자로서의 의무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헌법은 국가 통치 체제의 기초에 관한 각종 근본 법규의 총체다. 또 헌법은 국가의 조직, 구성 및 작용에 관한 근본법이며 다른 법률이나 명령으로 변경할 수 없다. 헌법과 관련한 사항의 판단기관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다. 이곳에서는 탄핵 심판, 위헌법률 심사, 정당 해산 심판, 헌법소원 심판, 국가기관 사이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등을 관장한다. 이처럼 헌재는 국가의 최고 법치 기관 중 하나로, 헌법 수호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핵심 역할을 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의 최종 변론이 지난달 25일 헌재에서 열렸다. 지난해 12월 14일 국회에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 73일만이다. 이날 윤 대통령은 최후 진술을 통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계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에게 혼란과 불편을 끼쳐 드린 점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그러나 “직무에 복귀하면 개헌과 정치개혁 추진에 임기 후반부를 집중하겠다”며 그 과정에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도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탄핵심판 소추위원인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윤 대통령이)헌법을 파괴하고 국회를 유린하려 했다”면서 “파면해 헌법 수호의 의지를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윤 대통령의 사과는 여러 차례 언급됐지만, 진정성 없는 포괄적 유감 표명 수준이라는 게 중론이다. 비상계엄 이후 국가적 손실과 국민적 상처에 비춰 보면 자성과 뉘우침은 여전히 미진하다. 윤 대통령은 최후 진술과정에서조차, 화가 난 국민 감정을 달래기보다 계엄선포 정당성을 주장하며 국회 봉쇄와 정치인 체포 등 위헌·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했다. 무장한 군대를 국민의 대의기관에 투입한 것에 대해선 “고작 280명의 실무장도 하지 않은 병력만 투입했다”고 변명했다. 1명의 군인이라도 국회 무력화를 위해 투입해서는 안되는 것이 헌법 정신이다. 11차례 변론 과정에 보여준 윤 대통령의 발언과 태도는 헌법 수호자로서의 예의를 갖췄다고 보기 힘들다.
계엄에 대한 반성과 성찰보다 장난 같은 은유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탄핵 심판 5차 변론에 출석한 그는 “이번 사건을 보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시했니, 지시받았니, 이런 얘기들이 마치 호수 위에 빠진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언급했다.
5차 변론 엿새 후인 지난달 10일 오전 10시 58분 부산 기장군에 있는 한 은행에서 30대 남성이 돈을 탈취하려다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비닐에 싸인 총 모양의 물건을 손에 쥐고 있었던 그는 2분 만에 시민에 의해 제압당했다. 비닐에는 공룡 모양의 장난감 물총이 있었다. 이 남성은 공과금을 내지 못해 살던 오피스텔에서 쫓겨났고,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필요한 게 많아진 상황이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물총은 아들 장난감으로 확인됐다. 누리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분짜리 은행 강도가 어디있냐”며 “물총 든 강도가 특전사 동원한 대통령보다 감옥에 오래 있을 듯”이라고 비유했다. 다친 사람 없고, 빼앗긴 돈이 없다고 강도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헌재는 대통령 탄핵 심판 변론을 종결한 상태에서, 재판관 평의를 거쳐 이달 중순께 선고를 내릴 전망이다. 문제는 그 후다. 탄핵 찬반 집회로 나라는 갈라지고 일촉즉발의 충돌 위기를 맞고 있다. 헌재의 인용 결정으로 대통령이 파면되든, 기각돼 복귀하든 둘로 갈라진 국민 마음을 통합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헌재 결정에 승복한다는 메시지를 내놔야 한다. 헌법 수호자인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다. 탄핵 심판 소추위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도 동참해야 한다. 현재 결정은 곧 헌법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경우에 대비해 지지자를 부추기는 행위는 ‘제2의 내란’이나 다름없다. 12·3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은 이제 헌재의 결정만 남았다. 헌재가 헌법 정신에 근거해 국민통합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현명한 결정을 내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2025-03-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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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금융 자사고'라는 이름의 '인서울 준비반'
지난 10일 부산의 한 식당에서 한국거래소의 출입기자 신년 간담회가 열렸다. 한국거래소는 본사의 부산 이전 20주년을 맞아 부산의 금융중심지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한국거래소 측이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3개의 핵심 방안이 나열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거래소가 첫 번째로 내세운 ‘부산 금융 특화 자율형 사립고 설립’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거래소와 부산시, 부산시교육청, BNK금융지주가 설립을 추진 중인 전국 단위 금융 자사고는 부산의 국제 금융중심지 도약을 위한 ‘글로벌 금융인재 육성’에 방점이 찍혔다. 이 자사고는 2029년 개교를 목표로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17일 꾸려진 부지선정위원회가 부산의 16개 구·군을 대상으로 부지 공모 절차에 돌입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금융 자사고에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 뒤 부산의 금융 인재로 오롯이 남아 있을지 말이다. 한국거래소 측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학생이 금융 자사고에서 공부한 뒤 금융이 자신의 길이 아니다고 생각하고 다른 진로를 선택한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 지역의 금융 인재 육성이라는 금융 자사고 설립 취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실 교육 과정의 자율성이 보장된 자사고는 국·영·수 과목을 집중적으로 강화할 수 있어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 유리한 구조다. 자사고가 의대 진학을 위한 경로로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일부 학부모와 학생들의 선호도 또한 높다. 이 때문에 입시에 편중된 자사고에서 심도 깊은 금융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진정한 지역의 금융 인재를 키우고 싶다면 학생이 졸업 후 금융계에 바로 취업할 수 있도록 금융 특성화고를 설립하거나, 지역 대학과 협력해 전문 교육을 강화하는 게 더 나은 대안일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금융 자사고를 추진하는 진짜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결국 부산에 이른바 ‘인서울’ 실적이 뛰어난 고등학교를 세우려는 게 아닐까. 실제로 한국거래소가 금융 자사고 설립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런 의구심을 키웠다. 금융 자사고 설립 브리핑을 진행하던 한 관계자는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으로 올 때 읽은 기사를 언급했다. 그는 서울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부산 지역 고교가 드물다고 지적하며, 이를 근거로 부산의 교육 환경이 수도권에 비해 뒤처져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거래소는 금융 자사고가 수월성 교육을 목표로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정은보 이사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사례를 언급하며 경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시장에서 1등과 2등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말하며, 치열한 경쟁이 결국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는 메시지로 귀결되는 듯해 씁쓸했다. 미국의 엘리트 금융인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했지만, 결국 탐욕과 단기적 이익 추구가 월가를 지배하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그 결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엘리트들이 시장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도 금융시장의 역사가 잘 보여주는 셈이다.
한국거래소가 지역의 ‘소멸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인서울 진학률이 높은 자사고 설립 카드를 쉽게 내놓을 수 있었을까 싶다. 부산은 2020년 대도시 중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데 이어, 불과 4년 만에 노인 인구 비율이 23.87%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1만 3657명이 순유출됐으며, 특히 20~30대 청년층의 유출률이 1.1%를 기록하며 수도권으로의 인구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역 대학들은 신입생 감소로 존폐 위기에 몰렸다. 금융 자사고를 통해 인서울 진학생을 늘리는 것이 지금의 부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이유다.
지역 교육계 일각에서는 금융 자사고의 설립이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시도와 맞물려 있다는 추측도 나온다. 서울의 금융권 종사자들이 부산으로 내려오기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로 ‘부산에는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다’는 점이 지적됐다. 물론 이 교육기관은 수도권 소재 대학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는 학교를 말한다. 금융 자사고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채택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부산시장이나 부산시교육감이 득표를 염두에 둔 정치적 이득으로 이 정책 추진에 나섰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소멸 위기의 도시에서는 경쟁력 있는 금융 중심지가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금융 자사고가 '입시 사관학교'로 전락한다면, 이는 오히려 수도권으로의 인재 유출을 부추기는 꼴이 된다.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수도권 대학 진학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황석하 블록체인팀장 hsh03@busan.com
2025-02-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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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교육감 직선제, 대체 언제까지
하윤수 전 교육감의 중도하차로 부산은 교육 수장을 다시 선출해야 한다. 출사표를 던진 인사만 8명이다. ‘정치 비수기’가 때아닌 교육감 재선거로 달아오르고 있다.
사전 선거운동으로 직을 날린 전 교육감 탓에 혈세 낭비는 불가피하게 됐다. 그러나 더 기가 차는 건 정치색을 숨길 생각조차 않는 새 교육감 후보들이다. ‘교육 자치’를 표방하던 교육감 직선제의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교육위원 간선제로 치러지던 교육감 선거는 지방자치 확대와 발맞춰 지난 2007년 직선제로 바뀌었다. 밀실 합의와 금품 선거 등 간선제의 폐해가 극심했던 게 원인이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택한 직선제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리 봐도 국민의힘 후보와 저리 봐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좌판을 깔고 있다. 여야 모두 직접적인 개입만 삼갈 뿐 이미 일부 캠프는 총선 조직과 인원이 동원되는 중이다. 다들 알고도 모른 척 할 뿐이다.
정당 선거는 공천을 통해 수준 미달 후보를 걸러낸다. 물론 유권자 눈높이에야 못 미치지만 그래도 일단은 당에서 후보의 자격을 검증해 왔다. 하지만 정치색을 빼겠다며 이를 생략한 교육감 선거는 매번 후보가 난립하고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덩달아 선거판을 쥐고 흔들려는 단일화 단체 인사들까지 어깨에 힘을 준다. 보수 진영, 진보 진영 할 것없이 단일화 단체가 나서 존재감을 과시하려 든다. 출전 선수 명단이 나오기도 전에 ‘자칭 심판’이 설치고 다니는 형국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전국적으로 교육감 직선제를 보완하던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시도지사와 교육감을 한 데 묶어 선거를 치르자는 ‘러닝메이트제’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 11월 김대식 의원과 서지영 의원이 시민 토론회를 여는 등 공론화에 착수했고, 이미 여러 차례 법안 발의도 이뤄졌다.
물론 러닝메이트제가 도입되면 교육 현장에 정치와 행정의 개입이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는 당연하다.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교육감 후보가 정치색을 스스로 칠하고 나오는 판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차라리 선거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게 맞다. 부적절한 인사의 선거 개입을 막고, 붕괴 위기의 공교육에 정치와 행정과 버무려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도록 말이다.
특히나 부산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교육 환경 재편이 빠르게 이뤄져야 하는 상황이다. 시장과 교육감의 ‘잘못된 만남’만은 안될 말이다. 시청과 교육청 간의 엇박자 행정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너무나도 크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속출하고 있는 폐교 문제만 해도 그렇다. 시청에서는 이를 복합시설로 재활용해 보려 교육청을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협조는 요원하다. 공유재산 관리법 개정으로 공익 목적이라면 폐교 부지를 지자체에 무상 이관하는 것도 가능해졌지만 지금까지 부산에서는 단 한 건의 부지 이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시청이 칼자루를 쥔 신도시 조성 등 도시계획 입안 과정에서는 교육청의 발언이 큰 힘을 갖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신설 학교 용지가 외곽으로 밀려나면서 발생하는 통학거리 조정과 학생 수 유지 등 후유증 관리는 오롯이 교육청의 몫이다.
직선제의 폐해가 커지면서 교육 서비스의 수혜자인 학부모의 한숨도 깊다. 지난해 10월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의 투표율은 겨우 23.5%. 자녀가 없거나 자녀가 장성해 교육 정책에 관심이 먼 유권자까지 한 데 묶어놓은 직선제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났다. 부산시 교육감 재선거 역시 큰 차이는 없을 전망이다. 저조한 투표율 속에 후보의 정치 성향만 보고 던진 ‘깜깜이 표’는 교육 현장의 난맥상으로 이어진다. 이를 감내해야 하는 학부모와 학생은 안중에도 없다.
교육감 직선제를 다시 돌아볼 시기가 됐다. 이는 교육 자치에 대한 일방적인 폄훼가 아니다. 지난해 말 서울교총 설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5%가 ‘현행 직선제를 폐지 혹은 보완해야 한다’고 답했다. 교육계 내부적으로도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교육계는 정치를 탈피해 교육 자치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교육과 행정, 정치를 과연 분리하는 게 맞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던질 수 밖에 없다. 이미 성숙 단계에 이른 지방 자치와 합이 맞는지도 되물어봐야 한다. 아쉽게도 교육감 직선제는 그 어떤 물음에도 답을 주지 못했다. 부산 유권자가 교육감 재선거에 피로와 회의감을 느끼는 이유를 새 교육감 후보들은 알아야 한다.
2025-02-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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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15분 도시'로 재도약 꿈꾸는 양산 물금읍
경남 양산시가 최근 물금읍 재도약을 위한 ‘내일의 도시 물금, One Stop Life’라는 비전을 발표했다.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신도시 조성으로 지역 다른 곳에 비해 인프라가 잘 갖춰진 물금읍에 대한 시의 비전 발표라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17년 신도시 완공 이후 계속 증가해 온 물금읍 인구가 최근 13개월 연속 줄어들며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자 시가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선 것이다. 물금읍 인구는 13개 읍면동을 가진 양산시 전체 인구의 33%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 물금읍 인구는 2021년 9월 12만 1006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증감을 반복하다 2024년 말 11만 6836명으로 최고점 대비 4170명이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세대 수는 372세대가 늘었다. 인구는 줄었지만, 세대 수는 늘어난 것이다.
‘물품 거래를 금하지 말자’라는 뜻을 가진 물금은 1900년 전 가락국 역사서인 개황력(118년)에 지명으로 첫 등장했다. 당시 물금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에 위치한 데다 사통팔달 교통망으로 인해 자유무역지대가 됐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역참이 설치돼 운영됐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고속도로인 영남대로가 지나가면서 동래와 언양 등 주변 16개 역을 관할하는 황산역까지 설치되는 등 주요 도시로 성장과 변신을 거듭해 왔다.
물금읍은 30여 년 전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한다. 낙동강이 범람하면 일시적으로 물을 저장하는 유수지 역할을 담당했던 전·답이 아파트가 가득한 꿈의 신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곳에는 56개 공동주택 4만 7881가구와 단독주택 3400가구 등 총 5만 1000여 가구에 15만 2000명의 주민이 거주하게끔 설계됐다.
1994년에 착공한 신도시는 공사 과정에서 IMF 사태 등으로 6차례나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7년 말 완공 때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부 목표를 달성했다. 부울경 지역 중심에 있고 지하철과 자전거도로, 대규모 공원 등을 포함한 인프라를 갖췄다. 부산에 비해 낮은 가격(땅값·아파트 분양가)도 물금읍 성공의 또 다른 이유다.
문제는 신도시가 22년 만에 완공되면서 공사 초기에 건설한 인프라와 건축물이 노후화했고 사송신도시까지 조성되면서 인구 유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자리와 진학 때문에 젊은 인구 유출도 늘어나고 있다.
시는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물금읍 재도약 비전까지 발표하게 된 것이다. 비전의 키워드는 ‘One Stop Life’인 ‘15분 도시’다. 주거와 업무, 상업, 학습, 의료, 여가 등 생활에 필수적인 다양한 시설을 복합적이고 밀도 높게 갖춰 주거지 가까운 곳에서 도보나 자전거 등으로 15분 안에 이용할 수 있도록 물금읍 도시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15분 도시 개념은 프랑스 소르본대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가 만든 것으로 2020년 파리 시장이 파리를 재설계하는 데 적용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서울시와 부산시도 이 개념을 도입해 추진 중이다.
물금읍 재도약 핵심은 도시개발과 재생 사업을 통한 인구 유입, 문화 인프라와 관광자원을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어디든 빠르고 쉽게 오갈 수 있는 도로망 확충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물금신도시 조성 과정에서 빠졌던 개발제한구역인 물금읍 증산리 80만㎡ 부지를 계획인구 1만 5000여 명이 거주하는 미니신도시로 개발하는 것이다. 시는 최근 사업자 공모와 개발제한구역 해제 절차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정부의 공간혁신구역 선도 사업에 선정된 부산대 양산캠퍼스 110만㎡ 중 유휴부지로 방치 중인 54만여㎡ 부지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4000가구의 주거단지와 산학연구단지, 문화시설(양산문화예술의 전당과 시립미술관) 등이 조성된다. 인구 유입과 일자리 창출, 문화인프라 확충까지 동시에 해결할 복안이다.
시는 또 부울경 지역 최대 수변공원인 낙동강 황산공원 시설 업그레이드와 낙동강 관광자원 활성화, 낙동선셋 바이크파크 조성, 물금지구 뉴빌리지사업, 범어지구 도시재생사업도 펼친다. 사업이 완료되면 물금 도심과 황산공원을 잇는 곤돌라가 설치되고, 낙동강 유람선도 운항한다.
15분 내 어디든 빠르고 쉽게 갈 수 있도록 남물금 하이패스 IC 건설에 착수했고, 토교~물금 간 도로 건설, 오봉산터널 개설, 경부선 물금역사 전면 리모델링도 추진 중이다.
각종 사업이 계획대로 완료된다면 물금읍은 명실상부한 15분 도시, 원스톱 라이프가 가능한 도시로 거듭난다. 살기 좋은 곳에 사람이 몰려드는 것처럼 물금읍 역시 신도시 조성 때처럼 많은 인구가 유입돼 양산은 물론 부울경의 핵심 거점도시로 거듭나길 고대한다.
김태권 동부경남울산본부장 ktg660@busan.com
2025-02-1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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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알고리즘 이겨내는 생활정치
2019년 봄, 부산에서 꽤나 흥미로운 정치 실험이 있었다. 당시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자유시민 정치 박람회’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시당의 부산행복연구원 산하 시민정치토론센터가 동력이었다.
시당은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 공간을 마련했다. 18개 지역구 당협, 산하 단체들이 각각 부스를 마련해 정책을 소개하고, 정책 비전을 공유하는 시간이 진행됐다. 청년 당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물론 당 대표까지 현장을 찾았다. 기대했던 젊고 자유로운 ‘스탠딩 파티’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척박한 정치 환경 속에서 그나마 선진 정치를 향한 첫걸음을 뗐다는 데 의미를 두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런 시도는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꼽히는 스웨덴의 ‘알메달렌 정치박람회’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해 6월 시당은 ‘알메달렌 원정대 출정식’을 열고 현장을 체험하도록 청년 정치인을 보내기도 했다. 박람회는 1968년 7월 휴가지인 스웨덴 고틀란드섬의 작은 마을 알메달렌에서 씨앗을 뿌렸다. 당시 휴가 중이던 교육부장관이 광장의 트럭에 올라 작은 정책 간담회를 연 게 시작이었다.
총리가 된 장관은 이듬해에도 알메달렌에서 자신의 정책을 이야기하는 행사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다른 정당 지도자들에게 참여를 제안하면서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1982년 진보와 보수, 극우와 극좌 정당, 성소수자와 환경 단체 등 이익단체, 어린이와 청소년, 기업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국민의 생각을 대변하는 이들이 일주일간 대규모 정치 축제를 여는 ‘알메달렌 주간’이 공식 출범했다.
행사 기간 동안 알메달렌의 광장과 골목, 호텔, 카페, 식당은 서로 소통하는 축제의 장이 됐다. 수천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세미나에서 수만 명이 얼굴을 맞대고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은 전체를 바라보고 종합하게 하는 선순환을 가져왔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삶을 바꿀 정책과 정치에 진심으로 다가가서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는 매너가 자리를 잡아갔다.
누구나 정치인이 되어 생활 속 정치를 실현하는 이 모델은 북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핀란드 등지에서 유사한 정책 박람회가 매년 열린다. 알메달렌 박람회는 정치 꿈나무를 키우는 공간으로서 더욱 특별하다. 어릴 때부터 정치를 꿈꾸는 아이들이 알메달렌을 경험하면서 어엿한 국가 대표 정치인으로 커가는 것이다. 광장의 꼬마가 지역 정치인으로, 다시 국회의원으로 단계를 밟아가며 성장하니 청년 정치가 정치 입문의 필수코스인 셈이다. ‘나름 성공했으니 이제 정치나 해볼까’하며 나선 이들에 밀려 청년 정치인들이 들러리를 서게 되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된다.
짐작했겠지만 굳이 지난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것은 지금 대한민국 정치 상황이 녹록하지 않아서다. 지난해 12월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발동은 정치의 중요성을 모두에게 일깨우는 각성 효과를 냈다. 정치를 혐오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이들까지 매일 정치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정치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뼈저리게 체감한 것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붕괴 직전이다. 심리적 내전 수준이라 해도 무방할 일들이 공공연히 벌어진다. 이 위기가 지난 뒤 시민들이 여전히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면 무능력하고 자질 없는 정치인이 그대로 득세할 것이다. 알맹이 없는 섣부른 정책이 난무할 게 뻔하다. 예산을 나눠 먹으며 불평등, 양극화, 수도권 집중화 현상 역시 더욱 가중될 것이다. 정치적 혐오와 무관심의 피해자는 결국 국민 자신일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첫 정치박람회가 열릴 때만 해도 북유럽의 어느 나라처럼 우리 정치인들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며 생활정치를 실현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소통하며 미래를 논의하는 모습을 언젠가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한데 지금 우리는 모두가 알메달렌의 교훈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20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거리두기를 하는 사이에 돈벌이만 생각하는 유튜브 등 SNS 플랫폼 알고리즘과 더 자극적인 콘텐츠로 경쟁하는 크리에이터들에 의해 더욱 강력한 정신적 지배를 당하게 됐다. 나의 생각에 오류는 없는지 끊임없이 토론하지도 않고 마땅한 근거나 검증 노력 없이 상대를 혐오하며 ‘도파민 중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아닐까. 우리나라뿐 아니라 인류가 이렇듯 공고한 ‘소셜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어떤 정치적 다름을 지녔든, 그들도 누군가의 부모이자 아들딸이다.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이다. 백척간두에 선 민주주의의 근간을 살리는 길은 결국 직접 대면하고 소통하며 생활 속 정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2025-02-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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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품격 있는 나눔의 도시
이번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춥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 12·3 비상계엄에 이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 따른 정치적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마음이 무겁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관세전쟁’은 수출 중심 국가인 우리나라에도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에 빠진 형국이다. 불안과 우울의 긴 그림자 위에 한파까지 덮치면서 몸과 마음이 더욱 위축되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2일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소식이 전해졌다. 부산 ‘사랑의 온도탑’ 나눔 온도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올해는 경기침체에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겹쳤지만, 이를 무사히 극복하고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부산 지역 시민과 기업의 온정은 한파를 물리칠 만큼 뜨거웠다.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부산사랑의열매)가 지난해 12월 1일부터 지난달 31일까지 진행한 ‘희망2025나눔캠페인’ 사랑의 온도탑 나눔 온도는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기준 124도였다. 총모금액은 134억 7000만 원으로, 목표액 108억 6000만 원을 26억 1000만 원 초과했다. 이는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역대 최고 모금 실적이다. BNK금융그룹이 지난해 12월 12억 원을 기부했고, 지난달 화승그룹 4개 계열사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고액 기부를 약정하는 ‘나눔명문기업’으로 동시 가입했다. 지난해 캠페인보다 기업 기부금 규모가 7억 원 이상 더 늘어난 것이 역대 최고 모금액 달성의 주된 요인이라고 한다.
부산사랑의열매에 성금을 전한 개인 기부자들의 다채로운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부산국제장애인협의회 강충걸 회장 가족이 대표적이다. 강충걸 회장과 부인 박영희 씨, 아들 예성 씨는 20년째 새해 첫날 이웃돕기 성금 기부를 이어왔다. 기부를 통해 이웃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점이 강 회장 가족에게는 더 큰 선물이 된다고 한다.
부산 사상구 덕포동 ‘해물왕창칼국수’ 박기대 대표와 김지영 부대표의 사연도 감동적이었다. 남편인 박 대표는 2017년 부산 아너 소사이어티 133호에 가입했고, 부인인 김 부대표는 지난해 11월 부산 아너 소사이어티 369호 회원이 됐다. 부부 아너 가입 소식이 〈부산일보〉에 소개되자 ‘칼국수를 먹으면 기부가 된다고 하니 좋은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손님이 많아졌다고 한다. ‘자신들처럼 평범한 사람도 기부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많은 사람이 기부와 나눔에 동참하길 바란다’는 이들의 소망이 깊은 울림을 줬다.
‘사랑의 온도탑’이 뜨거워지는 동안, 많은 단체와 기관이 지역 아동을 위한 따듯한 나눔에도 동참해 훈훈함을 더했다. (주)ERK 리더모아 영어도서관은 지난해 말 초록우산 부산지역본부에 저소득가정 아동을 위해 1400만 원 상당의 동절기 이불, 베개, 쿠션 174세트 등을 후원했다. 기부 물품은 부산 지역 복지관, 모자원,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 총 24곳의 아동복지기관을 통해 저소득가정 아동에 전달됐다. 리더모아 영어도서관 고영하 대표는 부산 지역 저소득가정 어린이들이 좀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해주고 싶어 이번 후원을 제안했다. 어린이용 이불, 베개, 쿠션을 받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니 흐뭇해진다.
자동차부품 회사 (주)퓨트로닉(대표이사 회장 고진호)은 올 초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에 또 1억 원을 기부하며 부산 지역 1호로 ‘레드크로스 아너스 기업 3억 클럽’에 가입했다. 퓨트로닉은 2014년부터 매년 연말에 일시 기부와 2023년 9월부터 정기후원으로 매달 100만 원씩 기부해 지난해 기부액이 2억 원을 넘어섰다. 올 초 1억 원 기부로 누적 기부가 3억 1000만 원에 달했다. ‘레드크로스 아너스 기업’은 대한적십자사의 단체 고액기부 인증 프로그램이다. 퓨트로닉 사례는 기업이 인도주의적 활동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일수록 주변을 살피고 보듬는 마음이 부산의 저력이 아닐까 싶다. 따듯한 공동체를 만드는 시민과 기업들의 나눔 선순환을 접하면서 (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인문무크지 〈아크(ARCH)’ 9호: 품격〉이 떠올랐다. 아크 9호 첫 장에 실린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가 쓴 ‘품격, 이타성의 다른 이름’이란 글 때문이었다. 장 대표는 “인간의 품격은 결국 나와 타인이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존중하고 공공선에 헌신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품격 있는 사람은 자기희생을 바탕 삼아 이기심을 억제하고 타인을 관용하며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다”고 적었다.
최근 활발한 나눔의 궤적을 보면서 부산은 품격 있는 도시로, 부산 시민은 품격 있는 존재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품격 있는 나눔의 도시, 부산’에서 타인과 공존하는 희망의 빛이 더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2025-02-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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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관광객 부르는 로컬
열차 안에 갑자기 ‘명탐정 코난’의 메인 테마곡이 울리고 원작 속 주인공 목소리까지 들렸다. 누가 실수로 동영상 오디오 기능을 켠 것인가 했더니 ‘이시카와현 관광 정보를…’ 하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철도 여행상품 안내방송이었다.
지난달 일본 혼슈 호쿠리쿠 지역을 방문했다. 한일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한국재팬리포터방일단’이 홈스테이를 하는 후쿠이까지 가기 위해 간사이국제공항에서 열차를 세 번 갈아탔다. 앞에 언급한 안내방송은 신오사카역과 쓰루가역을 잇는 특급 열차에서 들었다. ‘명탐정 코난 가나자와·가가·고마쓰 미스터리 투어’는 서일본철도여객주식회사와 이시카와현 등 지자체가 공동으로 만든 여행상품이다. 이용객은 작품 속 장소를 찾아 수수께끼를 푸는 동시에 지역 관광도 즐긴다. 2001년 시작한 코난 미스터리 투어는 구마모토·히로시마 등 여러 도시에서도 진행됐다. 인기 애니메이션 스토리를 더한 색다른 철도 여행으로 지역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안내방송에 대한 의문을 풀고 나니 좌석 주변 안내문에 눈이 갔다. 간이 테이블에 붙은 QR코드는 쓰루가역에서 호쿠리쿠 신칸센을 갈아타는 방법을 안내한다. 외국어 버전에서 한국어 선택도 가능하다. 열차에서 내리면 마주할 환경을 동영상으로 미리 확인하니 도움이 됐다. 좌석 앞 포켓에서 환승객을 위한 기간 한정 캠페인 전단을 꺼냈다. 후쿠이현 지역 정보 앱 접속자에게 1만 원 상당의 디지털 지역통화를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앱 가입자를 늘리면서 방문객의 지역 소비도 독려한다.
신칸센 플랫폼의 후쿠이현 공식 관광 안내 사이트 알림판과 지역 특산품 홍보 래핑 열차까지. 승객은 열차를 이용하는 내내 다양한 관광 정보에 노출되고 있었다. 지역 관광을 살리기 위한 철도회사와 지자체 협업의 긍정적 결과물이다. 어제 신문에 실린 부산진구청과 코레일의 철도 여행상품 개발과 운영 협력 기사가 반가웠던 이유다. 동해선과 중앙선 개통으로 부전역은 부산의 새로운 관문 역할을 하게 됐다. 인근 재래시장·상권과 연계한 관광 상품 개발로 지역에 활기가 돌면 좋겠다. 동해안권 도시와의 협력으로 부산발 새로운 K-관광 루트가 나올 수 있겠다는 기대도 해본다.
2024년 한 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633만 명. 같은 기간 방일 외국인 관광객은 3687만 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엔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인프라와 콘텐츠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한국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관광객 이동이 쉽지 않고 정보도 부족하다. 이에 비해 일본은 교통망을 확충하고 지역 고유의 스토리와 관광 콘텐츠를 발굴해 소도시까지 외국인을 끌어들인다.
실제로 현지에서 각종 관광 정보가 그물을 짜듯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후쿠이 시내에 위치한 요코칸정원에서는 제철을 맞은 수선화 꽃장식과 함께 에치젠 해안의 수선화 군락지를 소개했다. 기차역 1층 관광정보센터에는 지역별 정보를 제공하는 팸플릿이 다양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특산물 소바와 지역 사케를 함께 즐기는 ‘소바(BAR)’ 투어, 상점가연합회가 만든 시내 점포 가이드맵, 상공회의소가 발행한 체험 여행 안내서 등은 색다른 여행 계획을 짜는 데 도움이 됐다. 체험 여행의 경우 에치젠시의 칼 공방 집적지, 사바에시의 안경회관과 같이 지역 대표 산업과의 연결고리 역할도 했다. 후쿠이 등 여러 소도시를 방문한 한국재팬리포터방일단도 지역이 자신만의 강점을 극대화해서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지역 캐릭터나 지역 한정 컬래버 상품 개발이 한국에서도 더 활발하게 이뤄지면 좋겠다는 참가자도 있었다.
저출생과 고령화로 위기를 겪는 것은 한국과 일본 모두 같다. 일본 정부는 2023년 관광백서를 통해 관광 산업 발전 없이는 지역 사회와 경제를 지속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관광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숙박시설·관광시설 개선, 지역관광 통합 사이트 구축 등 여행자 편의성 강화, 자연·먹거리·교통·역사와 문화예술을 활용한 지역의 간판 상품 개발을 지원했다. 또 오래된 집을 활용해 마을 전체를 호텔로 변신시키기, 배움 여행으로 지역의 민속예능 이수자 부족 문제 해법 찾기, 도시 청년이 빈번하게 찾는 제2의 고향 만들기 등 소멸 지역을 살리는 국내여행 모델 개발에도 열심이다. 이 국내여행 모델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 2025년 8대 핵심사업에 ‘지역이 강한 나라, 관광으로 크는 지역’이 있다. K-관광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 더 자주 찾고 더 오래 여행하고 싶은 한국이 되기 위해서 ‘로컬리즘 추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더 많은 관광객을 부르는 부산다운 관광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의견과 제안이 오가는 공론의 장이 한 번쯤 필요할 것 같다.
2025-02-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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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상식적이지 않은 윤 대통령의 '계엄 방어법'
12·3 비상계엄 실패 직후 대국민담화에서 “모든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던 윤석열 대통령은 이후 수사에 일체 불응하고, 위헌·위법적 지시에 대한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계엄 포고령과 같이 증거가 명확한 부분은 ‘집행 가능성이 없는 상징적’인 것이라며 의미를 축소하거나 은근슬쩍 책임을 밑으로 떠넘겼고, 녹취가 없는 ‘지시’ 부분은 수명자의 신뢰성을 공격하면서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쓰고 있다. ‘싹 다 잡아들여라’는 지시 내용을 밝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의 폭로 동기를 ‘인사 불이익’으로 암시하면서 “(계엄 당일)통화를 해보니 벌써 반주를 한 느낌이 들었다”고 깨알 같은 항변을 남긴 게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공수처에 체포될 당시 관저를 찾은 여당 의원들에게 “나라가 위기인데 임기 2년 반 더 해서 무엇하겠나”면서 ‘정권 재창출’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 때만 해도 윤 대통령이 탄핵심판 등에서 자신은 물러나더라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의 폭거로 인한 헌정 질서의 위기는 막아야 한다고, 좀 크게 대응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법정에 선 윤 대통령의 모습은 법의 허점을 찾아 요리조리 피해가려는 일반 형사범의 태도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로서 당당한 기백에 매료됐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왠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일 헌재의 5차 탄핵심판 변론에서 “상식에 근거해 본다면 이 사안의 실체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윤 대통령 측이 들고 나온 ‘계몽령’이 궤변인지, 아닌지 몇 가지 쟁점을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자. 윤 대통령은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안 의결을 저지할 생각도, 정치인을 체포하라는 지시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 계엄군은 도대체 왜 그 밤에 유리창까지 깨면서 본회의장에 진입하려고 기를 썼으며, 절대 복종 관계인 군 지휘관들은 왜 있지도 않은 군통수권자의 지시를 ‘문을 부숴서라도’ 등 구체적인 표현까지 동원해 날조했을까? 계엄 선포 직후 그 급박한 시간에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통화한 적 없는 국정원 1차장에게 전화해 ‘간첩 잡는 데 협조하라’는 일반적 지시를 내렸다는 설명은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나? 윤 대통령 자신도 논리가 좀 궁색하다 여겼던지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은 많지만 결국 지시했다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실체가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일텐데, 범죄 미수도 범죄라는 것 또한 당연한 상식이다.
계엄 실패 직후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거취를 당에 일임한다”던 윤 대통령이 한 달 만에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이는 건 예상치 못했던 지지율 급상승으로 ‘복귀’ 가능성이 열렸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9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을 살펴봤다. 공무원 임면권 남용, 언론 자유 침해, 국민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 등 4개의 혐의 중 탄핵 사유로 인정된 것은 최서원(최순실) 씨의 국정개입 허용과 대통령 권한 남용 단 한 가지였다. 여기에 수사 불응, 부정확한 해명 등으로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는 판단이 더해졌다. 이에 비춰보면 윤 대통령 탄핵심판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 상식적 판단도 명료해진다. ‘법잘알’인 윤 대통령이라고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전면 부인 전략은 탄핵 인용 이후에도 불복하는 지지층을 모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속내도 깔렸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기대가 미몽으로 끝날지 반전이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발등의 불은 여당인 국민의힘에 떨어졌다. 계엄 초기 대두된 ‘질서 있는 퇴진론’은 수습의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였을 뿐, 윤 대통령의 직무 수행이 더 이상 어렵다는 건 친윤(친윤석열)계도 공감하는 바였다. 그러나 지지층 결집에 고무된 당 지도부는 이젠 ‘옥중 발언’까지 챙기며 윤 대통령을 당의 중심으로 다시 끌어왔다. 어렵게 단절한 ‘아스팔트 보수’ 세력과 더 깊게 손을 잡았고, 변방에 머물렀던 부정선거 음모론에 점점 편승하려 한다. 사법부 테러 행위를 양비론으로 감싸면서 헌재 재판관을 향한 사상 검증이라는 낡은 전가의 보도를 다시 끄집어냈다. 2020년 ‘총선 폭망’ 이후 30대 이준석 대표를 앞세워 건넜던 ‘탄핵의 강’에서 다시 되돌아와 어렵게 축적했던 전국정당화의 자산들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있다. 법 체계 내에서 점진적 변화를 모색하는 보수 정당이 폭력을 옹호하고, 법치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자기 부정 행태를 보이지만, 내부 자정 기능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 듯하다.
‘집토끼’만 챙기면 중도층은 자동적으로 끌려올 것이라는 지금 여권 내부의 팽배한 믿음은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중도층의 마음에서 크게 이탈해버린 국민의힘의 앞길에 험난한 가시밭길을 예상하는 시각도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을까.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2025-02-0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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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국력 다시 모아야 할 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은 현재 미증유의 내우외환”이라고 진단했다. 밖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데 안으로는 여야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북한은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병력을 파견하면서 전격 개입했고 도널드 트럼프가 최근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주요국에 대한 관세 부과 등으로 글로벌 무역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주요 거래국에 대한 관세 부과를 결정하고 향후 한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반도체, 철강 등에 대해서도 관세 부과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우리 정부와 기업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미국발 글로벌 관세 전쟁의 직간접적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작년 10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이 있는 한국을 포함해 보편 관세를 부과하고, 주요국이 맞대응하는 최악 시나리오가 펼쳐진다면 한국 수출이 최대 448억 달러 감소할 수 있다고 전망됐다. 이 경우 한국의 국내총생산(GDP)도 0.29~0.69%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무역적자를 두고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역대 최대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한 한국 정부도 무역수지 균형을 위해 미국산 원유·가스 수입 확대 등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흑자 규모는 지난해 기준 중국, 멕시코, 베트남, 독일, 아일랜드, 대만, 일본에 이은 8위다. 한국의 지난해 연간 대미 무역 흑자 규모는 556억 9000만 달러였다.
정부와 대통령실도 최근 연일 대책 회의를 열고 미국의 관세 부과 조치와 국내 기업·수출에 미치는 영향과 대응 방안 등을 논의중이다.
기업들도 각 분야별로 미칠 파장에 수시로 대책회의와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 증대, 수출처 다양화, 생산기지 이전 등을 검토하고 있지만 비용과 효율성 면에서 제약이 커 이러한 대안들을 당장 추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부자 나라인 한국을 지키는 데 미국이 돈을 많이 쓰고 있다”고 주장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용으로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카드를 내밀 수도 있다. 실제 J.D. 밴스 미 부통령이 국내외 주둔 중인 미군의 규모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글로벌 전력 현황 검토 결과에 따라 주한미군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외부 정세가 심상치 않은데, 국내 정치권은 해법 찾기는커녕 계엄·탄핵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 시기에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 부산역 광장은 주말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가 열리며 국론 분열만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이를 놓고 일부에선 1945년 광복이후 신탁통치냐 반탁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좌우 진영이 극한적 대립양상을 보였는데, 그때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동안 뒷짐 지고 있던 정치권도 마지못해 움직이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3일 미국의 관세압력에 대해 “국회에 통상 특위 만들어 ‘관세 문제’에 초당적 대응을 하자”고 했다. 정쟁 중단 얘기는 쏙 빠져있다.
일단 한국으로선 미국의 관세 등 각종 압력에 외적으로 혼자 감당하기보다는 국가간 단합이 우선이다. 벌써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관세공세가 계속된다면 대중국 압박에 대해 협조하지 않겠다”며 집단대응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한국도 일본 등 아세안 국가들과 힘을 합쳐야 한다. 이번 미국발 관세전쟁에서 우리와 처지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구 5000만 명의 소국으로 석유나 철광석 같은 주요 자원도 빈약한 상황에서 거둔 성과는 놀라울 정도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과 군사력 세계 5위, 1인당 GDP가 3만 6000달러에 이른다. 문화 분야에서도 영화, 가요, 드라마 등 K콘텐츠를 앞세워 강국이 됐다.
이 같은 성과는 그냥 이뤄진 게 아니다. 우리 국민이 숱한 외세침입과 일제탄압, 6.25 한국전쟁, IMF 외환 위기 등 숱한 역경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한국민들에게는 위기시에 특유의 국난 극복 DNA가 작동한다고 얘기한다. 이번 상황도 잘 헤쳐나갈 것으로 믿는다.
2025-02-0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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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말할 수 없는, 정치
“나 엄마 톡을 차단했어. 엄마는 모르시겠지만….” 지인 A는 최근 SNS 메신저에서 가족을 차단 목록에 넣는 극단의 조치를 했다. A는 “어머니가 극우 유튜브 채널의 링크나 기사 같은 걸 보내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라 어쩔 수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엔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다가 정치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크게 다퉜다며 울분을 토했다. 넘을 수 없는 세대의 벽 때문일까. 평소엔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 편인데, 정치에 대한 의견만큼은 하나도 맞지가 않아 답답하다는 게 그의 고민이다.
다가오는 설 연휴에 가족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1순위로 정치가 꼽힌다. 8년째 구급대원으로 일해온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당신이 더 귀하다〉라는 책을 펴낸 저자 백경(필명)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명절에 가족끼리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119에 신고가 들어올 정도면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주먹다짐에, 심하면 칼부림까지 나기도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에 비하면 지난해 설에 등장한 ‘잔소리 메뉴판’ 같은 건 애교 수준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이 메뉴판은 걱정하는 척하며 비수를 꽂는 친척들의 말을 유료 결제 후 듣겠다는 기가 막힌 발상을 담았다. 예를 들어 ‘어느 대학 갈 거니?’라는 말에는 10만 원의 가격을 매겼고, ‘회사에서 연봉은 얼마나 받니?’라는 질문을 하려면 50만 원을 내라는 식이다. ‘머리가 좀 휑해졌다’ 같은 상처 주는 말이나 ‘둘째는? 외동은 외롭대’ 같은 선을 넘는 질문엔 최대 100만 원까지 가격을 책정했다. 심지어 올해는 이런 가격표를 옷에 인쇄한 ‘잔소리 티셔츠’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돈 안 되는 잔소리는 원천 차단하겠다는 강한 의지마저 읽히는 세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의미 있는 토론이 가능할 것 같은 정치 이슈가 어쩌다 입에 담지 못할 금기의 주제가 된 걸까. 불과 수십 년 사이에 급격한 체제 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룬 우리나라의 특수한 환경 탓에 세대 간 인식 차가 지나치게 큰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꼽힌다. 40대 중반인 지인 B는 “개발도상국 시대에 태어난 우리가, 선진국에서 태어난 요즘 애들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한다. 극명한 세대 차이를 또 그렇게 ‘팩트 폭행’하며 설명하니, 듣는 이들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80대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20대 후배 C는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끼리 뉴스를 볼 수가 없게 됐다고 한다. 정치 얘기만 나오면 다투게 된다는 게 이유다. 탄핵 찬성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는 “할아버지는 ‘어떻게 감히 대통령을 끌어 내리냐’고 생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 대통령을 마치 왕정 시대의 왕 모시듯 하는 것 같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살아온 궤적이 달라서 설득은 절대 불가능한 것 같다”면서 “할아버지도 박박 대드는 60살 차이 손녀가 얼마나 미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물론 정치적 견해 차를 단순히 세대의 문제로 치부할 순 없다. 지난 19일 서울서부지법에 침입해 난동을 부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현행범 90명의 절반 이상이 20~30대인 것만 봐도 그렇다. ‘태극기 부대’로 상징되는 기존 극우 세력이 노년층이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다. 일부에선 탄핵 찬성 집회의 주요 참가 층이 20~30대 여성이었다는 점과 이번 난동을 주도했던 층이 20~30대 남성이었다는 점을 들어 성별에 따른 차이를 부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젠더 갈등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쓴 미국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셜 미디어가 정치인의 급진적 행동을 조장한다”며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이 과격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극우 유튜버 등의 주장을 주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대화와 설득, 협상과 타협이 사라진 곳에 아집과 불통, 갈등과 분열이 자리 잡는다. 각자가 보고 싶은 뉴스만 소비하며 확증편향을 강화하기보다 열린 자세로 토론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한 때다. 가까운 사이에도 논하기 힘든 금단의 영역에 정치가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다른 의견도 기꺼이 경청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이 가짜 뉴스와 정치 양극화를 막는 예방책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억지스러운 침묵이 아니라 건강한 대화와 합리적인 토론이 아닐까.
2025-01-22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