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30년, 롯데 30년 부산의 거인, 그들을 만난다] <18> '검은 갈매기' 펠릭스 호세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역대 최강 용병이자 부산 사랑한 다혈질 사나이

펠릭스 호세가 홈런을 날린 뒤 특유의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역대 최강이었던, 그리고 가장 '부산 사나이'다웠던 거인의 외국인 선수는?

한화 이글스로 이적한 카림 가르시아나 지난 시즌 10승 투수인 라이언 사도스키가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대다수 부산 팬들은 그를 최강의 롯데 자이언츠 용병으로 뽑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검은 갈매기' 펠릭스 호세다.

지난 1999년 한국프로야구에 처음 뛰어든 그는 4년 동안 부산 야구팬들을 열광케 했다. 2007년 부진으로 쫓겨났지만 4시즌 동안 타율 0.309에 95홈런, 314타점, 411안타의 성적을 남겼다. 사상 첫 2경기 연속 만루홈런, 63경기 연속 출루, 역대 최고령 홈런 등 다양한 기록도 만들었다. 2001년에는 역대 한 시즌 최고 출루율(0.503)을 기록하기도 했다.


99년 입단 4시즌 동안 타율 0.309
95홈런·314타점·411안타 출중
'빈볼' 배영수 구타 등 사고 빈발


그는 한국프로야구에서 보기 드문 스위치 히터였다. 1999년 5월 29일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에서는 4회 왼쪽 타석에서, 8회 오른쪽 타석에서 홈런을 날려 한 경기 좌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호세가 처음부터 놀라운 성적을 낳으리라고 기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이었던 그는 추위를 많이 타 스프링 캠프에서는 늘 두꺼운 옷을 껴입고 훈련했다고 한다. 어찌나 추워했던지 캠프 칠판에 'SNOW CAMP?'라고 적어 놓고 도망칠 정도였다. 추위를 많이 타니 몸이 제대로 풀릴 리가 없었다. 연습할 때도 두꺼운 옷을 입었던 호세의 배팅은 모두 땅볼이거나 비껴 맞았다. 외야로 날아가는 타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김명성 전 롯데 감독은 "도저히 안되겠다. 다른 용병을 찾아보라"며 스카우트들에게 간곡히 주문할 정도였다.

호세는 팀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사건이 생기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롯데 선수들이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 연습장을 찾았을 때 일이다. 배팅 머신에서 날아오는 공을 일본 선수들은 뻥뻥 쳐댔지만 롯데 타자들은 제대로 치지 못하며 쩔쩔 맸다. 그 모습을 본 호세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껴입었던 옷을 벗고 타석에 섰다. 그는 이때부터 주변 선수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일본 롯데와의 연습경기에서도 시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김 전 감독은 최고 용병을 버릴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다.

호세는 한국야구위원회(KBO)에 1965년생으로 등록돼 있다. 그러나 미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중남미 선수들이 대부분 나이를 속여 줄이는 것처럼 그도 2~5살 정도는 줄였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팀을 생각하는 마음과 시원한 성격은 가끔 문제도 일으켰다. 2001년 마산에서 열렸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호세는 배영수로부터 몸에 맞는 공으로 1루에 걸어나갔다. 다음 타자 훌리안 얀에게도 빈볼성 공이 들어가자 그는 1루에서 이승엽의 제지를 뚫고 마운드로 달려가 배영수의 얼굴에 사정없이 주먹을 날려버렸다. 프로선수로서는 당연히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자신에 이어 팀동료에게 빈볼이 날아가는 모습을 본 호세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 행동 때문에 잔여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훗날 정수근이 트레이드돼 사직야구장에 왔을 때 그가 배영수랑 닮아서 착각한 호세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고 한다.

롯데 팬들은 1999년 롯데-삼성의 플레이오프를 잊지 못한다. 5차전 9회 롯데의 마지막 공격. 롯데는 시리즈 전적에서 1승3패로 뒤져 있었고, 이 경기를 내주면 그대로 탈락이었다. 상대 투수는 당시 최고 마무리였던 임창용. 위기의 순간 호세는 기적같이 역전 3점 홈런을 뽑아냈다. 팬들은 풀쩍풀쩍 뛰며 베이스를 돌던 호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이어 7차전. 홈런을 때리고 홈에 돌아오는 호세에게 대구 관중이 오물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호세는 화가 나서 방망이를 관중석으로 날렸다. 팀 동료들이 겨우 그를 제지했다.

이렇게 잊을 만하면 사고를 치는 그였지만 부산 팬들은 늘 '우리 호세'라며 감싸안았다. 호세는 택시, 음식점에서부터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할 수 있는 술집까지 부산 어디에서도 공짜였다. 롯데 팬들은 그가 야구장에서 보여주는 호쾌한 모습에 반해 그의 기살리기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행여 음식점이나 술집에 호세가 출동하는 날이면 여종업원들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와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는 게 소원이었다.

호세도 그런 부산이 좋았다. 다혈질적인 성격의 사나이지만 정이 많았던지라 자신을 아껴주는 팬들과 선수들에게는 애정을 쏟았다. 당시 호세의 통역을 맡았던 조현봉 운영팀 매니저와 자신의 컨디션을 챙겼던 이진오 트레이너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잘해줬다고 한다. 당시 투수진 막내였던 김사율에게도 정이 많았다.

조 매니저는 "롯데에서 활약할 당시 호세는 고참급이어서 선수들도 그를 선배로 대우해줬다. 지금이야 김사율이 선배급이지만 당시는 막내여서 김사율이 호세를 많이 따라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호세도 김사율이 마음에 들었는지 '브라더'라고 부르며 막내 동생처럼 아꼈다"고 덧붙였다. 가끔 식당에 밥 먹으러 가기 귀찮으면 김사율에게 밥을 방으로 가져오라고 해 함께 먹기도 했다. 호세는 한국을 떠나서도 가끔 전화 연결이 될 때마다 "사율이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는다고 했다.

호세는 2002년 롯데와 재계약을 약속해 놓은 상황에서 미프로야구 구단과 이중계약을 해버렸다. 배신감을 느낀 롯데는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영구제명을 신청했다. 호세를 잡지 못한 당시 이철화 단장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한 호세는 롯데에 오고 싶어했다. 한 번은 조 매니저가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고 있는 걸 느꼈단다. 설마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전력질주로 뛰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호세였던 것. 그는 조 매니저를 보자마자 "날 데리러 왔니? 롯데에서 야구하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부산에 돌아오고 싶어하던 호세는 결국 2006년 1월 부산항에 돌아왔다. 부산을 떠난지 5년 만이었다.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호세는 곧장 사직야구장으로 달려갔다. 사직야구장에서는 때마침 천연잔디를 깔기 위해 공사를 하고 있었다. 호세는 공사장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활짝 웃었다고 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며 호세를 기다린 롯데 팬들만큼 호세도 부산이 그리웠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두 번째 생활은 처음만큼 화려하지도 못했지만 그는 부산에서의 야구생활을 여전히 좋아했다고 한다. 부산을 좋아하고, 부산 야구를 아꼈던 호세는 지금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부산을 그리워하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흥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1999년 프로야구 소사

■프로야구 매직·드림 양대 리그제 시행

■롯데, 팀 창단후 한 시즌 최다승(75승) 달성

■롯데, 한국시리즈 준우승

■한화 이글스 팀 창단 14년 만에 첫 우승

■프로야구 FA제도 첫 시행

■OB 베어스, 두산 베어스로 팀 명칭 변경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