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과 함께하는 다크 투어리즘 부산, 전쟁의 흔적 위에 서다] ② 부산진성·다대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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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첫 격전지… 우리 성 헐고 축조한 왜성 흔적만 남아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제단인 정공단. 사진= 문진우

"성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은 모조리 죽여라. 피를 흘릴 수 있는 것들은 개나 고양이까지도 남김없이 죽여, 그 피로 전쟁의 신에게 제사(血祭)를 올릴 것이다." ('서정일기' 참조)

성을 함락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졸들은 이미 광기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칙쇼! 모두 죽여라!" 일본도가 빛을 받아 번득일 때마다, 선혈이 튀며 흰옷에 붉게 물이 든다. 300호 마을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높은 비명만 낭자하게 성 안을 가득 채울 뿐이다.

"애비가 죽은 곳에 아이가 울고, 아이가 죽은 곳에 어미가 칼에 베어 죽어나가기를 반나절. 성 안에는 3천의 시신들로 산을 이루고, 그들의 피로 강을 이뤘다.(屍山血河)"

성을 함락하고 '도륙의 성찬'을 마친 뒤, 왜군들이 한 일은 부산진성(釜山鎭城·지금의 금성고등학교 뒤 구릉 일대)을 허물어버린 것. 부산진 지성(釜山鎭支城·지금의 자성대 자리)도 함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흩어버렸다. '우리 앞을 가로막으면 모두 이렇게 될 것'이란 상징적 경고. 그렇게 조선의 성들은 차례로 허물어지고 만다.

왜장 모리 테루모토는 부산(釜山·지금의 증산)의 정상에 서서 부산포 앞바다를 내려다본다. "으음, 과연 조선의 요충지로군. 부산포 앞바다가 훤히 보여. 이곳에 성을 지어 조선 침략의 거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야."

1592년 여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이후 왜군의 해상 보급로가 끊기자, 도요토미는 각 해안 교두보에 물자 비축과 방어를 위한 왜성 축조를 명한다. 이에 살아남은 조선인을 징발해 최초로 성을 쌓기 시작한 곳이 바로 부산진성 터 자리의 왜성(일명 증산왜성·증산공원 일대). 조선의 외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수성의 성터에, 외적에 의해 조선을 공략하는 교두보가 서게 된 것이다.

"부산진성 터에 우리 성의 흔적은 없습니다. 지금의 성터 흔적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축조한 왜성의 흔적입니다. 부산진성 터 왜성은 크게 3종류 성으로 축조되는데, 증산과 마을을 에둘러 싼 외곽성인 제3성, 증산 구릉에 계단식으로 산을 깎고 그 자리를 다져 만든 제2성, 증산 중앙 정상에 쌓아올린 본성이 그 것입니다."(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

증산근린공원으로 가는 길. 마지막 추색이 완연하다. 산도 그렇고 바다도 그렇고 길 또한 그렇다. 모두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소나무 위 까치가 속절없이 "까작까작"거린다. 공원 입구에서 게이트볼장 쪽으로 성벽이 보인다. 이곳이 증산왜성 제2성의 자리다. 우리 성의 전통 축성법과 달리 지대석과 기단석이 없고 성벽이 하단부에서 상단부로 오를수록 날렵하게 곡선을 그린다. 전형적인 왜성의 전통축조기법이다.

그 성벽을 돌아 공원의 제일 높은 마당에 선다. 본성의 천수각(天守閣)이 있던 자리다. 증산 정상을 깎아 만든 천수각은 왜성의 제일 중심인 본성의 지휘소이자 망루 역할을 하던 건물. 지금은 천수각을 받치고 있던 성벽, 천수대의 흔적만 남아 있다.

천수대 자리에서 사위를 둘러본다. 앞으로는 부산 앞바다가 훤히 보이고 뒤로는 만산홍엽의 수정산, 엄광산이 병풍처럼 둘러쳤다. 그 시절 부산포를 방어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것 같다. 가히 부산포를 관장할 만하다.

왜성은 천수대를 중심으로 증산을 두르며 똬리를 틀듯 게이트볼장, 동구 시민도서관, 좌천아파트 부근으로 성벽의 흔적을 남겼다. 좌천아파트 축대에도 무너진 성터 흔적이 남아있다. 1m는 족히 넘을 돌무더기로, 그 중 한 개에 '宋文○'라는 이름자가 새겨져 있다. 혹시 방치된 우리 성돌의 흔적은 아닐까? 돌을 잠시 만져본다. 폐허의 돌무더기에서 찬 기운이 돈다. 손이 에이듯 시리다. 마음마저 착잡해진다.

부산 동구 좌천1동 어린이집 옆 왜성벽을 지나 계단 길을 내려온다. 이 왜성을 쌓기 위해 증산을 오르내렸을 조선인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 곳이 싸~ 하다. 이들은 죽지 못해 연명의 수단으로 부산진성 터 왜성과 자성대 축성에 부역했을 것이다.

끄덕끄덕 왜성 길을 계속 내려 오다 보니 임란 시절 부산진성 남문 자리였던 정공단(鄭公壇·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0호· 일신기독병원 옆)이 보인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鄭撥), 부관 이정헌, 애첩 애향, 충복 용월 등 의인들을 기리는 제단이다. 일제에 항거하다 폐쇄됐던 옛 부산진육영학숙 자리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던 남문 문루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은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미 바다는 700척의 왜선으로 새카맣게 덮여 있는 상황.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을까? 그 와중에도 불안해하는 성내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소경 악사에게 밤새 퉁소를 불게 했단다. 그리고 미명과 함께 시작된 치열한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임진왜란에서 장렬히 순절한 첫 장수가 된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과 함께 부산진 지성도 고니시군에게 함락된다. 지금의 자성대 자리이다.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를 살펴보면 부산진 지성 서문(현재 부산진시장 쪽)으로 바다가 넘실거리는데, 군선의 접안이 쉬운 이곳을 왜군들은 그들의 보급기지로 삼았을 것이다. 그래서 함락 후 지성을 허물고 왜성을 쌓았는데, 이 성 역시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축조했다.

자성대(子城臺). 원 지명은 부산진 지성(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7호). 왜성의 모성(母城)에 딸려 있는 성이라 하여 자성대라 부른다. 부산진 지성 서문 금루관 주위의 은행나무들이 제 가진 것을 다 떨어내는 중이다. '우수수~' 은행잎이 바람에 가을비처럼 흩날린다. 잔디밭이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부산진 지성에서도 우리 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정교하게 짜 맞춘 왜성이 산책길을 따라 도열하듯 서 있을 뿐이다. 이곳도 부산진성만큼이나 험난하고 기구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임진왜란 때는 성이 허물어지고 왜성의 자성(子城)이 되었다가, 다시 부산진첨사영으로 재축성 됐으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우리 성의 원형은 사라지고 현재의 왜성 흔적만 남아 있다.

이렇게 우리의 성은 임진왜란과 함께 허물어지고 복원되지 못했다. 그 위에 왜성의 흔적들만 나무숲과 새소리에 묻혀 침략의 세월을 웅변하고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부산진 지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서문에다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란 기둥 돌(부산진 지성 서문성곽 우주석·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9호)을 세운다. '남쪽 국경은 나라의 목과 같이 중요하고,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이 굳건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진왜란 후 부산진 지성을 새로 축성하면서 '왜군을 크게 경계하라'라며 새긴 것이다. 


부산일보-부산관광컨벤션뷰로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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