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영화랑] 칸에서 '시'의 울림이 들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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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에 가는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지난 2000년 칸에 갔을 때 느꼈던 한국영화의 역동적인 활기와 맞먹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때 한국영화는 임권택의 '춘향뎐'이 경쟁부문, 홍상수의 '오! 수정'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이창동의 '박하사탕'이 감독주간 부문, 정지우의 '해피엔드'가 비평가 주간에서 상영됐다.

세대와 장르가 전혀 다른 영화들이 한국영화라는 이름으로 구획지어졌던 것이다. 외국 언론은 한국영화의 정체가 한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두고 퍽 신기해했다. 올해도 사정은 비슷해서 이창동의 '시'와 임상수의 '하녀'가 경쟁부문, 홍상수의 '하하하'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장철수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비평가 주간에 상영된다.

최근 몇 년간 예술적으로 침체해 있다고 여겨지던 한국영화계에서 여전히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밥맛 나는 일이다. 특히 필자는 이창동의 '시'가 놀라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연륜의 깊이는 재능을 세공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생에 대한 비전을 재조정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의 전작들도 삶에 대한 개인의 윤리적 선택을 묘사했지만 '시'에서는 그 묘사의 수위가 각별하다. 사람들이 시에 무관심해졌다고 말하는 요즘 세태에서 시를 쓰고 싶어하는 가난한 촌 할머니의 얘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너도나도 오락을 원하는 시대에 영화로 예술을 하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묻는 것과 똑같다. '시'는 그런 점에서 절절하다. 예술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길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라고 조용히 속삭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직 개봉 전인 영화라 자세히 줄거리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시'는 처음부터 패를 까고 시작하는 카드놀이와 같다. 별다른 극적 고저가 감지되기 힘든 이야기라고 예상하고 90분가량을 지켜보면 그때부터 서서히 영화의 리듬이 고조되기 시작해서 그때까지 잔잔했던 영화의 흐름이 실은 고요한 표면 밑에 거센 물줄기를 숨기고 있던 강물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영화의 후반 30여분 동안 치고 올라오는 극적 반전은 관객에게 스토리의 반전에만 집중하게 하는 신경자극용이 아니라 나이를 먹을 수록 지게 되는 삶에 대한 책임의 문제, 자신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예술가의 결단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나는 그 점이 특히 경이적이었다. 돈이 신앙이 된 시대에 가난한 할머니가 연습장에 끄적인 시, 단어 하나 생각해내는 것도 힘들어하는 알츠하이머 병 초기 증세에 시달리는 할머니가 세상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누군가의 불행에 예민해지면서 결국 쓸 수 있게 된 시의 고통을 끌어안은 아름다움, 그걸 거의 완벽하게 영상으로 옮겨낸 공력이 놀라웠다. 아마도 올해 칸에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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