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를 찾아서] <6> 밀양 퇴로리 '삼은정' 회양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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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담기지 않고 제 생긴 대로 '당당'

밀양 퇴로리 삼은정 뒤뜰에 서있는 회양목. 무너진 흙담장 사이로 햇볕이 가득 들어와 회양목은 행복한 봄 색이다. 사진=박정화

주택가를 걷다가 담 위로 잘 자란 나무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면 그 집 정원이 궁금해진다. 대문 사이를 설핏 들여다본다. 심어진 수목이나 조화로운 뜰의 형태는 매만진 손길과 햇볕으로 따뜻했을 사람의 한때를 상상하게 한다. 요즘은 집 형태가 거의 아파트로 통일되어 나무를 담 밖에서 나눌 수 있는 즐거움도 사라지지만 그 전에는 내 집을 지으면 무슨 나무를 심을 거라고 마음속 정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억눌림 없이 잘 자란 사람처럼 연둣빛 잎엔 부드러운 광택
산수유·매화 꽃소식 알리기 전 노란 싸라기 꽃 먼저 피워


3년 전, 밀양을 지나는 길에 퇴로리 여주이씨 고택의 정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우연히 보게 된 그 정원은 꿈속에 보는 듯했다. 단아한 누각과 운치 있는 연못, 한옥의 앞뜰과 뒤란에 심어져 있던 귀한 나무들, 말로만 듣던 대왕송, 백송을 그 때 첫 대면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뿜어내는 그윽하고 고독한 향속을 걷는 일은 말 그대로 호사였다. 나무 사이를 걷는 외에 옛사람과 옛 시간 속을 걷는 깊은 기운을 감히 누렸다.

이번에는 그 정원을 목적지로 해서 가기로 했다. 화악산 아래 부북면 퇴로리에 영화 '오구'의 무대이기도 했던 여주 이씨 종택이 있다. 내가 본 정원이 있는 '삼은정(三隱亭)'과 '서고정사(西皐精舍)'와 '천연정(天淵亭)'은 종택 담 밖에 떨어져 지은, 이를테면 별당이라 할 수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세 집을 '세 아들 집'으로 부른다.

여전히 대왕송과 백송은 높고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번 길에는 저번에 보지 못한 다른 나무를 발견했다. 정원을 일굴 때 주목(主木)을 밑받침하는 하목(下木)으로 심어지는 회양목이다. 삼은정의 후원, 높다란 둔덕을 이루어 크고 귀한 나무들을 심어놓은 한 구석에 회양목은 서있다.

회양목은 도시에서도 정원이나 잔디밭 생울타리를 만드는 나무로 가장 흔하게 보는 나무다. 늘 가위질 되어 줄 세워져 있던 나무가 제 모습으로 당당히 자라있는 걸 처음으로 보았다. 자기만의 고유한 생김을 따라 자유롭게 벋은 줄기를 보니 설레었다. 작은 단추 같은 잎들이 춤추듯 물결선을 그리는 나무 아래 서본다. 나무에게서 내게로 정화의 파동이 전해지는지 마음 편안하다.

사람도 억눌린 게 없이 잘 자란 사람 표정을 보면 밝고 환한 것처럼 한껏 잘 자란 회양목 잎의 빛깔도 연둣빛 부드러운 광택이 흐른다. 후원을 둘러싼 흙담이 고개를 숙이듯 무너진 자리에 서있어 햇살을 담뿍 받고 있다.

회양목은 뜰에서 제일 먼저 봄이 닿는 나무다. 아직 산수유도 매화도 꽃소식을 알려오기 이른 2월에 귀엽고 노란 싸라기 꽃을 피운다. 자잘한 꽃이 잎과 비슷한 색인데다 고개를 빼들고 피지 않고 잎 사이에 얌전히 묻혀 피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지나치게 된다. 그래도 누가 보아주건 말건 부지런한 사람 같은 이 나무는 지금 꽃피우기에 한창이다. 오늘 아파트 길을 지날 때 눈높이를 낮추어 회양목꽃과 눈을 맞춰주면 어떨까. 얼마나 더디게 자라는 나무인지 '윤년의 겨울에는 오므라든다'는 과장된 말도 있을 정도라 회양목은 300년 된 여주의 천연기념물 나무도 5m 남짓이다. 집이 지어진 지가 100년이 넘으니 이곳 회양목의 나이도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 키를 훌쩍 넘겨 3m도 더 되어 보이는 높이다.

더디 자라는 만큼 재질이 단단함을 지닌 회양목은 글 새기기에 적합하여 도장을 만드는데 훌륭한 재료로 쓰인다. 그래서 '도장나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임금의 옥새까지 새기며 관인과 선비들의 낙관을 만들었다. 호패제도가 있을 때도 호패제작에 많이 쓰여서 지금 우리나라에 큰 회양목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하니 흔한 나무라지만 쓰임이 귀한 나무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어른들이 덕담으로 큰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들 하지만,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쓰임이 있고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중요한 쓰임이 있다. 날마다 거울 속 얼굴을 보듯 마주치는 작은 나무, 이웃들의 정다운 웃음에서 따뜻하게 부추기는 힘을 얻지 않는가. 가위질로 가꾸어놓은 틀에 담기지 않고 제 모양대로 당당히 자란 삼은정 회양목이 그래서 더 소중하고 반가웠다. 회양목 꽃말은 '참고 견뎌냄'이다. 이 어려운 때를 살아가는 작은 나무인 우리들이 지닌 소박한 힘 그대로이다.

이선형·시인 andl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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