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메르켈의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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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진 국제팀장

폴란드 북부 항구도시 그단스크의 베스테르플라테 요새.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45분, 이곳에선 세계의 역사를 피로 물들이는 첫 포성이 울렸다. 나치 독일이 전함을 앞세워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것이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그날 그 시각, 이 비극의 현장에 독일의 최고 권력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학살자'가 아닌 '역사의 죄인'으로서 참회했다. 그의 손에는 총 대신 파란색 유리병에 담긴 촛불이 들려 있었다. 검은색 정장차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나치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한 폴란드의 정신에 촛불을 바쳤다.

"오늘은 나치 독일의 죄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전쟁과 학살로 인해 받았을 희생자들의 고통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습니다. 그들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메르켈의 사죄는 폴란드인의 가슴에 다가갔다. 메르켈의 손에 촛불을 들려준 사람은 폴란드 소년이었다.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말했다. "역사를 해석하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기억은 제각각이지만 '사실'은 하나뿐입니다. 역사를 왜곡해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나치의 폴란드 침공 후 10여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 땅에선 민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다. 3년간의 전쟁에서 100만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상당수는 '학살'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만행을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반세기란 긴 세월이 필요했고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2006년 1월 마침내 진실화해위원회가 가동됐고 그동안 신청사건 1만1천17건 가운데 절반가량을 처리했다.

지난 11일에는 1961년 집권세력을 비판하다 '용공'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유족에 대해 국가가 99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다. 또 같은 날 유신에 반대하다 내란죄로 기소돼 중형을 선고받았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 대해서도 35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두 판결 모두 진실화해위와 국정원 과거사위의 진상조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실화해위는 한시조직이라 내년 4월이면 활동기한이 끝난다. 때문에 출범 당시 태생적 한계에 대한 우려가 높았다. 잘 알려진 노근리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AP, BBC 등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이 수 년씩 매달리고 미국 정부까지 조사에 나섰지만 아직도 진상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진실화해위란 작은 조직이 그 많은 사건을 조사한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위원회는 최선을 다했고 상당한 성과를 냈다. 진실화해위는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고 인권국가로서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을 수포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 과거사위 폐지 방침을 밝혔고, 한나라당은 진실화해위의 결정을 재심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했다. 진실화해위 위원 15명 가운데 9명이 올 연말을 전후해 임기가 끝나는데 충원과정에서 위원회의 급속한 보수화가 우려되고 있다. 뉴라이트계를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 위원회를 장악한 뒤 활동기간 연장을 통해 그간의 결정사항들을 뒤집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원회의 활동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시민사회단체가 오히려 기간 연장에 반대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오늘도 전범을 단죄하기 위해 고삐를 죄고 있다. 누가 정권을 잡든지 이는 국가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상 최악의 만행을 저질렀지만 철저한 반성을 통해 용서를 구함으로써 오히려 모범이 되고 있다.

독일의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과거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새로운 감염의 위협에 쉽게 노출된다"고 경고했다. (최호근, '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p.17)

진실화해위를 향해 예산을 낭비하고 '과거사 장사꾼들'의 '큰 밥통'이라고 비난하는 세력은 이데올로기의 망령에 사로잡힌 '수구'(守舊)일 뿐 결코 '보수'가 아니다. 메르켈의 사죄를 본받아야 한다. kkj99@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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