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 썰물] 황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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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를 쓴 영국 소설가 잭 런던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1904년 조선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왕도를 따라가면서 그는 길이 도로라기보다는 웅덩이에 불과하다고 한탄했다. "말을 끌고 가는 사람은 우선 말이 넘어져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게 기도하고, 다음에는 그 짐승이 자기 몸을 덮치며 쓰러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했다."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너나없이 불평을 터뜨린 것이 도로였다. 우리나라를 네 번이나 찾았던 영국왕립지리학협회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길은 보통 시간당 3마일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하다. 여름이면 먼지가 많이 일고, 겨울에는 진흙탕이었다"라고 적으면서 "조선의 도로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소"라고 단언했다.

역사학자 강만길은 조선시대 도로가 이처럼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지배계층의 통치 방침에서 찾았다. 인구 이동이 잦으면 백성을 다스리기 어렵고, 농경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여행을 자주 다니면 작업시간을 빼앗기며, 길을 따라 번성하는 상행위가 백성들의 사행심을 키워준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박천홍)

불편했지만 자연 그대로였던 조선의 길이 신작로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치도사업 탓이었다. 이 사업에는 당시 한 신문의 사설에서 지적했듯 '조선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주머니를 뺏어가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한 향토사학자가 피땀어린 노력으로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주요 간선도로였던 황산도를 찾아냈다고 한다. 당시 마을길과 숲길들은 이제 국도와 고속도로에 밀려 흔적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신작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경제공간이 전 지구적인 폐해를 키우는 지금, 전통적 지리공간을 연결하던 '불편한' 옛길의 재발견이 무엇보다 반가울 수밖에. 이정호 논설위원 lee6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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