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봄이여, 아름다운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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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태현 편집국 부국장

지난 겨울은 최악의 경제난에 취업난까지 겹쳐 유난히 춥게 느껴졌다. 그러나 봄은 왔다. 요 며칠 사이에 고양이처럼 살짝 다가온 봄기운이 완연하다. 거리 곳곳에 개나리가 피고, 목련이 몽우리를 터뜨릴 기세다. 겨우내 숨어 있던 생명의 기운이 세간의 우울한 소식들을 뚫고 나와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온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따사해진다.

봄은 청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고교를 졸업한 새내기들이 대학으로, 한편으론 재수 학원으로, 또는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으며 새 출발을 했다. 그들 모두에게 청춘예찬의 박수를 보낸다. 어디에서든 자신의 역량과 끼를 유감없이 발휘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대학 캠퍼스는 갓 입학한 새내기들의 생기발랄한 기운과 희망찬 꿈들로 생명력이 넘쳐난다. 그동안 입시전쟁에 억눌려 왔던 감정들을 마음껏 발산하고 낭만의 정취에 푹 빠져보는 것은 그들만의 특권이다.

그뿐 만이 아니다. 자기가 진짜 하고 싶었던 공부에 빠져보기도 하고,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앓아도 볼 일이다. 여행이나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의 곳곳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이들의 고민과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삶의 깊이도 배워간다면 금상첨화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점치지 못할 모든 가능성의 길들이 그대들, 아름다운 청춘들 앞에 무한히 열려 있다. 길은 어떻게 개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곳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이다.

청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일랜드 출신의 유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라는 자작 글이 새겨져 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속성을 이처럼 잘 표현한 명언이 또 있을까.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들을 읽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과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을 가슴 가득 품었던 고교시절이 필자에게도 있었다. 그로부터 벌써 30년 세월이 흘렀건만 버나드 쇼의 묘비명 글귀는 아직도 나에게 경종을 울리며 다가온다.

취업난의 현실을 반영하듯 대학가에서는 취업에 도움이 되는 수업의 수강신청을 위해 밤새워 줄을 서기도 한다. 취업률이 높은 '명품 동아리' 가입에 목을 매기도 한다. 학점관리와 토익점수 따기, 자격증 취득, 해외 연수 및 인턴 경험 등 구직에 필요한 외적 조건인 '스펙(specification)' 만들기에 올인 하는 게 요즘 대학가의 풍속도다.

심각한 경제난을 반영하듯, 대학생들이 자취생 룸메이트를 구하거나 책 벼룩시장을 찾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고도 한다. 부디 이 모든 난관을 잘 극복하고 사회의 당당한 일꾼으로 우뚝 서 주기를 기원한다.

다만, 새내기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재능과 개성, 장점을 하루빨리 발견해 그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비전을 세우라는 것이다.

실제 입사시험 직원채용의 기준도 이미 변화하고 있는 추세다. 국내 대기업의 한 간부에게서 들은 말이다. "학벌이나 천편일률적인 '스펙'보다는 조금 시험점수가 뒤지더라도 자신만의 확실한 장기를 가진 인재를 회사는 더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 모두에게는 잠재된 자신만의 자질이 분명히 내재해 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치 않고 그저 묻어두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책임 회피에 해당된다는 역설도 가능해진다. 자신의 재능에 맞게 최선을 다한 성과로 서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사는 세상의 바람직한 청사진이 아닌가.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고 한다. 확고한 믿음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도 중간에 포기하거나 나태해지지 않고 인내할 수가 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항상 머리에 그려가며, 한걸음씩 신중히 준비해 나가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미덕을 대학과 사회에 갓 진출한 우리 청년들이 가슴에 새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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