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⑦ 소년 독립투사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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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소학교 꼬마들에게 욕설 퍼붓고 도망"

1920년 9월 1일 부산 제7 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한 부산 중구 대청동 옛 동광초등학교의 1934년 모습. 1998년 문을 닫은 동광초등학교는 남일초등학교와 통합돼 오늘날 광일초등학교가 됐다. 옛 학교터에는 용두산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1930~40년대 일본인 초등학교는 조선인 초등학교보다 숫자도 많고 규모도 컸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꼬맹이 시절, 그러니까, 1930~40년대를 부평동의 일본인 거리 한가운데서 자라났다. 조선 사람의 집이라고는 단지 넷뿐인데, 그게 온통 일본인 집으로 에워싸여 있다시피 했다. 조선인으로서는 일본인 바다에 떠 있는 쪽배와도 같았다.

그러자니, 꼬마 시절부터 이웃의 일본인 아이들과 사귀게 되고 일본말도 절로 곧잘 할 수 있었다. '국어 상용', 이를테면, 조선인도 일본어를 국어로써 항상 사용토록 하라는 정책이,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강요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일본말을 씨부렁댔다. 그런 꼴로는 갈 데 없는 친일파였던 셈이라고 지금으로서는 참회해야 마땅할 것이다. 바로 옆의 또 다른 조선인 집에 살던, 이웃집 형은 '무슨 짱'이라고 불리곤 했는데, 이 '짱'이란 일본인들이 어린이 이름 밑에 정해 놓고 붙인 호칭이다. 그의 이름은 조선인의 조선인다운 이름이었는데도 그 마지막 한문자는 일본식으로 발음되었다.

초등학교 때 이웃집 형과 일본 학생들 괴롭혀
시설·환경 월등 日 학교, 조선인 '부러움 대상'


아무리 철없던 시절이라지만, 지금으로서는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고 해야 한다. 형과 나는 그런 환경에서 그 비슷하게 자랐다. 한데 조선인은 역시 조선인이었다.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이웃집 형과 나는 가끔 '항일투사'로 나섰다. 감히 안중근 의사까진 못되어도 일본인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을 드물게나마 우리 나름으로 해내곤 했다.

1930~40년대 그 당시, 지금으로 쳐서 부산의 중구와 서구에 해당하는 그 넓은 지역, 그것도 중앙동에서 영주동으로 가는 영선고개 너머 남쪽에서 조선인 아이들을 위한 초동학교는 오직 셋이 있었는데, 부민초등학교는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같은 지역 안에 일본인 초등학교는 넷씩이나 되었다. 지금의 남일, 토성, 동광 등의 학교는 일본인 학교였는데, 차례로 제1, 제4, 제7소학교라고 호칭되었다. 동광은 1998년에 폐교가 되어 남일과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광일초등학교가 됐다. 이 밖에 같은 지역 안에 자리하고서는, 해방 뒤에 한때 부산 사범학교 자리에 있던, 대신동의 제2 소학교 역시 일본인 학교였다.

그 무렵 조선인 초등학교는 보통학교로, 일본인 학교는 소학교로 일컬어지면서, 그 이름부터 이미 차별화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같은 지역 안에서, 조선인 초등학교의 수와 일본인의 그것은 '3대 4'의 대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식민지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

그렇게 일본인 초등학교가 우세하다 보니, 절로 우리 조선인 초등학교와 비교하게 되었다. 가령 훗날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남일국민학교가 된, 제1소학교를 처음 구경 갔을 때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교사 건물의 규모부터가 달랐다. 본관은 3층짜리 콘크리트로 어마어마했다. 운동장 한쪽의 수영장에는 물이 넘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목조 2층으로 된, 부민초등학교는 그것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솟구친 시기심 탓이었을까? 이웃집 형과 나는 전술을 짰다. 기회를 노려서 일본인 소학교에 치고 들어가서는 본때를 보이자고 별렀다.

훗날 광복 후에 동광초등학교가 된, 제7소학교로 원정을 가기로 했다. 우리 집이 있는 부평동 네거리에서는 불과 반 마장 정도라, 어깨에 몽둥이 하나씩 둘러메고는 적진까지 달려갔다.

마침 방과 후라서 운동장 여기저기엔 왜놈 학생들이 구더기 끓듯 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용감하게 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등지고 서서는 몽둥이를 흔들어대면서 냅다 함성을 질렀다.

'쪽발이 새끼들, 개새끼!'

기습을 당하고는 당황한 적들을 향해서, '용용 죽겠지!'하고 우리는 뒤돌아서서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때야 몇 녀석이 떼를 지어서 우리에게로 달려들 기세를 보였다. 우린 미리 준비해 호주머니에 채워둔 돌멩이를 기관총알처럼 쏘아댔다. 녀석들이 뒤로 물러섰다.

우린 재빨리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대청동 큰 거리로 해서 부평동 쪽으로 내달렸다. 한참 뒤에 패잔병들이 뒤쫓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몽둥이를 어깨에 메고는 보무당당히 활보했다. 그것은 대승을 거둔 우리, 항일투사의 개선 행진이었다.

1998년에 폐교가 된 동광초등학교 자리에는 기념비가 남겨져 있는데, 그 옆에 우리 어린 항일투사를 위한 비석 하나쯤 누가 세워주면 좋겠다. 서강대 명예교수


※ 시리즈 6번 '용두산 신사(神社)서 일본 신들에게 절하고'(본보 6월 13일자 10면)에서 용두산 신사가 철거당한 자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들어섰다고 표현됐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아닌 부산타워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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