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④ 부평동 사거리 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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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사먹은 '부스러기 과자' 진미 못 잊어

1910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상설 공설시장이었던 부평시장의 1920년대 모습. 지금의 부산 중구 부평동 부평맨션이 있는 곳이다. 부평시장은 1930~40년대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공영시장이었다. 국제시장이 부평시장과 규모면에서 비슷해진 것은 해방이 지나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오늘날 부산 중구 부평동 '부평시장'의 일제강점기 때 이름은 '사거리 시장'이었다. 1910년 문을 열었던 시장은 1915년 부산부에서 직접 운영하고 관리하는 '부영(府營)시장'이기도 했다. 1910년이면 한·일 합방이 일어난 바로 그 해다. 조선을 식민지로 집어 삼킨 일본인들이 '부산서는 합방하자 말자'며 그들이 주관하는 시장을 만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평시장은 일제 식민 정책의 제일선이고 최전방이었던 셈이다.

동전 '일 전' 주면 한 봉투 살 수 있어
조선인 노점, 밤엔 '꼬맹이들 놀이터'



· 부평시장, 전국적 규모 자랑

필자가 유소년 시절을 보낸 1930~40년대 부평시장은 아주 큰 시장이었다. 그 당시 부산 시내에서 규모면에서 부평시장에 비할 만한 시장은 없었다. 전국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큰 공영(公營)시장이었다. 해방 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국제시장이 어깨를 겨룰 수 있었지만 그건 아주, 아주 나중 일이다.

시장 규모는 엄청 컸다. 전(廛)들이며 점포(店鋪)가 늘어 선 가운데로 제법 넓은 통로가 십자를 그리면서 나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시장 안은 구획돼 있어서 어디를 보나 반듯했다. 말이 시장이지, 실질적으로는 부평동 2가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시가지였다. 가게를 화려하게 차린 2층짜리 집들이 사각형으로 구획을 가름하면서 무리짓고 있었다.

일본인 상인들이 차지한 공간은 그랬지만, 조선인 장사꾼들이 들어앉은 공간은 달랐다. 일본인들이 차지한 공간 바깥에 어설프게 곁다리로 달라붙은 꼴이었다. 반쯤은 노점이다시피 했다. 천막이 쳐진 아래에 판자로 얼기설기, 어른들 무릎 높이만큼의 진열대를 만든 것을 전(廛)으로 삼아서 장사를 했다.

일본인들이 차지한 시장의 한 공간에는 생선 파는 어물(魚物)전이 있었다. 1930~40년대만 해도, 남해안에서 잡힌 아주 싱싱한 해물을 사고팔았다. 그 신선도는 다른 곳 시장의 어물전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 어머니 따라 횟감 사러 가기도

꼬맹이 필자는 횟감을 사러 나선 어머니를 따라 현장에 가보기도 했다. 즉석 초밥을 냠냠거리고는 사 먹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생선 맛을 두고는 몹시 까탈을 피우곤 한다. 그것은 부평시장 생선 맛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인 상인들의 공간은 밤이면 우리들 꼬맹이의 놀이터가 되었다. 상인들이 가버린, 그 빈터나 다름없는 터전에서 우리들은 술래잡기를 하고 숨기놀이를 하곤 했다.

물건을 파는 제법 높다란 나무판자의 진열대 위를 뛰고 달리고 하는 것이 여간 신명나질 않았다. 이쪽 진열대에서 저 쪽 진열대로 멀리 뛰기를 하면, 판자가 짓밟히면서 쾅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우리들의 흥을 기세 좋게 돋우었다.


· 버려야 할 과자 애들 인기 상품

그 꽈당대는 소리는 우리들의 초저녁 장애물 경주를 부추기곤 했다. 상인들이 그걸 보면 질색하고는 야단을 칠 게 뻔했지만, 꼬맹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조선인들 전(廛)의 일부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과자를 팔았다. 제대로 된 과자 뿐만 아니라 부스러기 과자도 팔았다. 그걸 우리 꼬맹이들은 '뿌시래기' 라고 했다. 그것은 온전한 과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각나서 부서진 것들, 말하자면 찌꺼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어쩌면 버려 마땅한 것을 애들 상대의 상품으로 파는 것이었다.

동전으로 일 전짜리 하나만 가지고도 한 봉투씩 얻어 챙길 수 있었다. 우리 꼬맹이는 누구나 '뿌시래기 단골'이었다. 당연히 우리 부모는 그것을 못 사먹게 했는데도 나는 자주 금지령을 어기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된통 벼락을 맞았다. '뿌시래기'를 몰래 사서 집의 뒤편에 숨어 냠냠거리고 먹다가 아버지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그렇게 일렀는데도! 이놈이!" 노기충천한 아버지는 내게서 봉투를 낚아챘다. 그리고 봉투를 세차게 지붕위로 내던졌다. 그 순간 '뿌시래기' 가루가 내 얼굴과 입가에 엉겨 붙었다. 뒤로 돌아선 나는 입가의 그 진미(珍味)를 혀로 핥았다. 계속 냠냠거리는 나의 벌서기는 그래서 맛있었다.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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