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캔버스는 세상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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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 / 전영백 엮음

70년대 이래 한국미술은 모더니즘 리얼리즘의 미술, 그리고 세계성을 향한, 일상성을 모색한 다양한 미술을 펼쳐왔다. 사진은 '한국전위예술의 선봉장' 김구림. 사진제공=궁리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예술도 그 시대적 맥락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들은 때론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가면서, 때론 권력의 탄압을 받아가면서도 시대의 요구를 읽으려 했다.

'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란 책은 한국 현대미술의 자화상을 냉정하게 되돌아보려는 시도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전영백 교수가 2009년 미술사학과와 예술학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사를 시대적으로 정리하는 수업이 단초를 제공했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10년 단위로 시대별 화두를 정리하고, 그 시대의 대표 작가 대여섯 명의 인터뷰를 복합시킨 방식이다. 7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가 담겼다.

70년대 이후 당대별 화두 정리
시대마다 4~5명 예술가 인터뷰


거칠게 정리하면 70년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단색조 회화'가 블랙홀처럼 국내 화단을 지배했다. 극사실주의와 전위미술운동이 그 주변부와 하부를 받치고 있었다. 80년대는 모더니즘에 바탕을 둔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의 대립이 첨예하게 맞붙었고, 국제화를 화두로 삼은 90년대는 회화와 조각이란 전통적 장르를 벗어난 설치미술과 비디오, 사진 등의 새로운 매체로 미술이 확장됐다. 2000년대는 대안공간, 레지던시 프로그램, 공공미술, 현대성 등 다양한 실험적 태도가 분출하고 있는 중이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화두는 변해왔다. 문화적 맥락과 개인적 창의성, 전통과 현대, 보편성과 특수성이란 두 가지 축들 사이에서 작가들이 고민하고 갈등하긴 했지만, 작가들은 나름대로 치열했다.

이를테면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지만 블랙홀처럼 70년대 화단을 빨아들이며 사회에 대한 예술의 무관심을 불러왔다는 평가도 받는 단색조 회화에서 작가들은 대립각을 세웠다.

이승택(연기 바람 불 안개 등 자연현상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 형태 없는 조각을 시도한 작가)은 직방으로 겨냥했다. "단색조 회화에 똑똑한 사람도 많았는데, 거기에만 함몰돼 개성이 없어진 경우도 많았어요."

단색조 회화 작가군에 속하는 하종현(마대를 이용해 캔버스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넣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의 반박이다. "보이지 않는 외침으로 그 시대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평생 추상화를 그렸지만 세상과 동떨어져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성능경(일상을 비일상 같이 보여주는 퍼포먼스 작가)이 다시 받아친다. "70년대 주류 회화란 일컫는 단색조 회화는 한국의 70년대 사회상황을 외면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70년대 상황의 절박함에 대해 침묵한 것이죠. 미술은 삶의 조건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고, 그 조건을 성찰하는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저항도 필요합니다."

한국전위예술의 선봉장인 김구림의 말이 와닿는다. "예술가라면 사회에 뛰어들어 그 격류에 휘말려서 허우적대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아트페어나 옥션을 보면 대중의 기호에 맞춰 작업하는 작가들이 눈에 뜁니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신의 작가정신을 그렇게 팔아도 되겠나 하는 슬픔을 나는 느낍니다."

22명의 예술가에는 이밖에도 서승원, 송수남, 김인순, 주재환, 임옥상, 고영훈, 윤진섭, 김영원, 전수천, 구본창, 안규철, 최정화, 이용백, 유근택, 김주현, 배영환, 정연두, 최우람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70년대 이후 한국 미술의 흐름을 개괄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작품을 통해 발언하고 있는 작가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전영백 엮음/궁리/540쪽/2만8천원.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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