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우리 현대시] - 해 - <31> 박찬일 '검은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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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부도 들춰내는 강렬함

정익진 시인

<31> 박찬일 '검은 태양' (시집 '하나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문학에디션 뿔, 2009)

태양은 하늘의 세계를 함축한다. 태양은 격정, 혹은 타의 모범이 되는 영웅성과 맹렬성을 상징한다. 반면 검은 태양은 이 세계의 심층, 보이지 않는 바닥에 존재하며 이 심연으로부터 벗어나 서서히, 고통스럽게 하늘의 세계로 상승하는 곡예를 즐긴다.

태양은 세상의 중심에 위치한 모든 사물을 명징하게 비춘다. 하지만 검은 태양은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를 철저하게 들추어내는 역할을 한다.

즉 검은 태양의 빛은 단순히 '어둡다'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물의 뼛속까지 검게 비춰준다. 태양의 그것이 강렬한 만큼 검은 태양의 검은 빛도 강렬하다.

'검은 태양이 검게 반짝인다/ 밤의 태양 같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별까지 가면 다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별이 아니다/ 하나님까지 가면 다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깊고 어둡다/ 하나님은 계신 것만은 아니다/ 계시나마나인 것만은 아니다// 검은 태양의 하나님 영안실 7의 하나님/ 끊이지 않은 조문객/ 끊이지 않는 조의금/ 끊이지 않은 눈물/ 어디서 노랫소리 들렸으랴// 검은 것이 검게 반짝인다/ 존재하다 마는 하나님은 아니다' -박찬일 '검은 태양' 전문

박찬일 시인의 '검은 태양'을 반복해서 읽어본다. 어쩌면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서쪽으로 진다. 그리고 다시 동쪽에서 검은 태양이 떠오른다. 검은 태양은 밤새도록 밤을 주관한 다음, 태양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또다시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우리는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밤의 태양이나 검은 태양은 같은 말이다. 만약에 검은 태양의 확실한 정체를 우리의 눈동자로 확인할 수 있다면, 보는 그 순간 우리의 두 눈은 까맣게 타 버릴 것이다. 왜 하나님은 '깊고 어두운 것'일까.

검은 태양이 하나님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장남감이다. 별은 하나님일까. 역시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까지 가면 다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너무 부려먹어서 우주가 하나님을 배신했는가. 태양은 인간의 의식을 비춰주지만 검은 태양은 인간의 무의식을 비춘다. 그래서 검은 태양의 마술에 놀아난 뫼르소는 권총으로 사람을 살해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검은 태양에 지시를 내려 조문객을 모아서 조의금까지 가로채기도 한다. 때론 이렇게 타락한 하나님의 신격을 무시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는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태양도 검은 태양도 하나님도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박찬일의 시에 비춰진 대지는 검은 태양의 왕국이다. 어둠의 우물이며, 검은 안경의, 그리고 검은 비닐봉지의 세계이다. 검은 태양에 그을린 검은 하나님의 세계이다.

몇 해 전인가 충북 제천에서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첫 만남, 짧은 일별로 의기투합한 우리는 시와 시인 그리고 예술가적인 인간을 논하며 동이 틀 때까지 술잔을 주고받았다. 굵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천진난만하게 약간은 허탈하게 웃으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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