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대한민국·애국가·태극기 뒤섞인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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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코리아 판타지 / 정희준

스포츠는 그것 자체로만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시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커왔던 생물 같은 존재였다. 사진 제공=개마고원

전두환과 여운형의 공통점은? 둘 다 스포츠를 너무 사랑했다.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축구부 골키퍼를 맡은 전력을 과시라도 하는 듯 박종환 감독을 불러다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지시하기도 했고, 태릉선수촌은 하도 드나들어 아예 전용사무실을 따로 두기도 했다. 집권 초기 뭔가 서둘러 내놔야 했던 전두환에게 88올림픽 유치와 프로야구 출범은 매력적인 카드였다. 유치에 실패하면 빠져 죽으라는 군인정신으로 밀어붙여 이뤄낸 '바덴바덴의 기적'이었다.

구한말~2000년대 운동 종목 통해 사회문화사 조명
한국 스포츠 이면사 사회적 맥락서 흥미롭게 담아


6개월 만에 부랴부랴 출범한 프로야구 역시 독재정권의 횡포에 대중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2주기를 코앞에 둔 1982년 5월 15일과 16일 무등경기장에서의 홈경기 때는 소복 입은 3천명 가량의 여자들이 경기장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에 경기장을 전경으로 꽉 채우고 경기를 치뤄야 했고, 5·18에 대한 부담 때문에 KBO는 향후 몇 년간 5·18을 전후해서 광주에서 경기 스케줄을 잡지 않았지만. 어쨋든 5공화국은 스포츠로 해가 뜨고 스포츠로 날이 지는 스포츠 소비의 시대였다.

몽양 여운형은 조선 스포츠의 아버지였다. 육상 축구 야구 농구 권투 유도 택견 철봉 수영 등 당시 조선인들이 하던 대부분의 운동에서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 쉰의 나이에도 젊은이들과 겨뤄 투포환에서 1등을 했고, 축구평을 쓰고 야구심판을 하기도 한 그의 인생은 중요 고비마다 스포츠와 얽혀 있었다. 강건했기에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려 밀정들의 추적을 피했고, 경찰들이 달려들자 2층 창문에서 다른 집 지붕을 타고 도망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전두환과 다른 점은 운동경기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는 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도 그의 작품이었다.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가 쓴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개마고원/1만5천원)는 구한말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스포츠라는 코드로 읽어낸 한국의 사회문화사를 다룬 책이다.

안전벨트를 풀 줄 몰라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호놀룰루 시내에서 연습하다 길을 잃어 경찰의 도움으로 겨우 숙소에 돌아가는가 하면, 이역만리 샌프란시스코의 군비행장 활주로에서 짐과 함께 버려졌다가 온갖 우여곡절 끝에 1947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의 일화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1등으로 달리는 도중에 달려던 커다란 개 한 마리 때문에 중심을 잃어 나동그라지고, 신발끈마저 풀어진 상태에서 일궈낸 서윤복의 보스톤마라톤 우승은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상에 한국을 알린 쾌거였다. 국제무대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가난한 나라여서 대사관에서 초청해도 오지 않던 미국 유명인사나 외교사절들이 너나없이 들어찼던 워싱턴의 우승기념 축하연에서 가난한 나라의 서러움은 한꺼번에 날아갔다. 약소국에겐 스포츠를 통한 외교가 최고였다.

밥 먹은 게 꺼질까봐 아이들에게 "배 꺼진다. 뛰지 말아라"고 채근할 정도로 못먹고 살던 구한말부터 이 악물고 악에 받쳐 뛰어야 하는 '헝그리' 종목에서의 선전을 거쳐, 김연아의 피겨와 박태환의 수영에 환호하기까지 한국 스포츠의 이면사가 사회적 맥락에서 흥미롭게 읽혀지는 책이다.

저자의 결론은? 스포츠는 대한민국과 애국가, 태극기가 뒤섞인 판타지였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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