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정치비화 60년] 14. '아름다운 정치 신사' 서석재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동료의원 5명 위해 정치 기반 희생하고 국민회의 입당"

1991년 6월 15일 오후 부산 사하구 모 음식점에서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이 서석재(무소속)의원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부산일보 DB

서석재(1935~2009). 최형우와 함께 상도동계(김영삼 전 대통령의 본거지)의 2인자로 불린 인물. 164㎝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던져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보좌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계에선 상도동계의 맏형이자 '작은 거인'으로 불렀고, 감방동기인 고은 시인은 '아름다운 정치신사'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그의 정치인생은 험로 그 자체였다.

국민회의 "서석재가 빠지면 영·호남 통합은 없다"
'동해 사건'· 비자금 파문 딛고 무소속 당선 '괴력'


· 1997년 이회창 대선후보 지지 철회 뒷얘기

97년 민주자유당(민자당) 대선후보 경선 무렵. 이회창이 1등, 이인제가 2등을 달렸다. 이후 이회창 후보는 아들 병역 비리로 지지도가 급락했다. 이회창 후보 측이 서석재 측에 지원요청을 했지만 서석재 측은 "YS의 뜻이 밝혀질 때까지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서석재는 당 사무총장으로 당내 가장 큰 조직인 정발협(정치발전협의회)의 회장이었다. 당시 서석재의 보좌관이던 이종혁 현 한나라당 의원은 "이회창 후보가 '내가 집권하면 서 총장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메시지까지 보내왔다. 그러나 어른께선 '이 후보와는 멘탈리티가 맞지 않다'며 측근들에게 지원해주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고 전했다.

그러다가 이인제가 탈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서 총장은 한중의원친선협회 회장 자격으로 이회창 후보를 데리고 중국에 갈 생각까지 했다는 것. 그러던 중 민자당의 대선 활동인 '구미필승전진대회'에서 이 후보의 지지자들이 "경제를 망친 주범"이라며 YS의 모조인형을 몽둥이로 때리는 퍼포먼스가 지상파 방송의 9시뉴스를 타고 보도됐다.

이종혁 의원은 "당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어른께서 '봐라 저 사람하고는 안 된다 안카더나'며 노발대발했고, 곧바로 이회창 지지를 철회하고 탈당과 함께 이인제 지지를 선언하게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의원은 "당시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인제 후보가 대선 출마를 하지 않았고, DJ(김대중)도 대통령이 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얘기도 전해졌다. 당시 개인사무실 특보로 있던 안운환 현 NCS 하우징 대표이사는 "어른께서 모언론사의 정치부 기자로부터 이 후보가 민주계를 향해 '○○를 갈아먹겠다'는 심한 욕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이를 이 후보에게 직접 확인했는데, 이 후보가 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실이구나' 생각하게 됐죠. 아무래도 평소 이 후보가 거짓말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 1998년 '김대중당' 입당 사연은

서석재는 탈당후 이인제와 함께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국민신당은 98년 DJ집권 후 당시 호남을 기반으로 한 국민회의에 사실상 흡수 통합됐다. 부산출신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그로선 30년 정치생명을 건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입당을 결심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부산출신 의원으로서 어려운 부산경제에 도움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동서화합에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정치생명이 끝나도 좋다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 망국적 지역감정이 벽을 허무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와 관련, 안 대표는 "당시 어른께선 지역정서 때문에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잔류하려 했다"면서 "그러나 국민회의 측에서 '서석재 빠지면 통합은 없다'는 얘기를 해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함께 입당한 의원 5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희생한 셈이다.

그의 입당을 두고 지역구 주민들은 "실컷 뽑아줬더니 왜 김대중당에 가느냐"는 반응이 많았다. 한나라당 민주계에서도 "서석재는 이제 부산에서 끝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같은 그의 선택은 실제 2000년 4월 16대 선거에서 '족쇄'로 작용했다. 당시 보좌관이었던 박재호 전 국민체육진흥공단이사장은 "출마를 앞두고 어른께서 '부산서 내 평이 어떻더노'라고 물으셨는데, 지역민들의 냉담한 반응에 적잖게 상심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때 이후로 어른께서 몸이 많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선거득표율도 낮게 나왔구요."

· '오뚝이' 정치인

서석재의 정치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89년 8월 동해시 보궐선거와 95년 전직 대통령의 4천억 원 비자금 폭로다.

전자는 김영삼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이 88년 13대 총선에서 제2야당으로 전락한 뒤,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평가를 내세우며 동해 보선에 '올인'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당시 통일민주당은 후보 매수 사건에 휘말려 급기야 사과성명과 함께 김영삼 총재의 오른팔격인 서석재 사무총장이 탈당했다. 이후 대법원까지 간 끝에 서석재는 유죄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법원 판결을 받고서도 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 사하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는 점이다. 상대후보자들은 "재판에 계류 중이고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국회에 보낼 수 없다"고 공박했으나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던 것.

후자는 95년 8월 당시 총무처장관이던 서석재가 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한 발언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다.

"전직 대통령중 한 사람이 4천여억 원의 가·차명 계좌를 갖고 있는데 정부에 2천억 원을 줄 테니 나머지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느냐고 물어왔다"는 요지의 발언이다.

서 장관은 이후 "전직 대통령을 직접 거론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결국 서 장관은 사퇴했다. 당시 서 장관은 청와대 비서실장, 민자당 부총재로 물망에 올랐던 터여서 그의 낙마에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배동진 기자 djba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