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정치비화 60년] ② 대한민국 정치사의 모든 것 김영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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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의원 출마 때 장인이 고무신 1만 켤레 보내 곤욕

1987년 10월 17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부산 수영만 유세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부산일보 DB

대한민국 정치 산맥의 거산(巨山). 김영삼의 정치인생에는 항상 부산과 거제, 마산(현 통합창원시)이 중심에 있었다. 수많은 정치역정의 고비마다 이들 지역이 있었고, 때로는 위기와 역경을 딛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고향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천부적인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는 찬사도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지역주의를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정치입문

김영삼이 태어난 곳은 경남 거제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인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 파도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마을은 어린 김영삼에게 큰 포부를 안겨줬고 그 스스로도 '삶의 또 다른 탯줄'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정치 고비 때마다 고향서 천부적 승부사 기질 발휘
'사진발' 좋은 수영만서 대선 깃발 지역감정 이용 비판
3당 합당 내각제 합의 공개파문 땐 '탈당' 배수의 진


장목소학교와 통영중학교를 다녔던 김영삼은 해방이 되던 1945년 11월 부산의 경남중 3학년으로 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대통령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평생의 반려자인 부인 손명순과의 만남은 마산에서 이뤄졌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외아들을 일찍 결혼시키고자하는 조부모와 부모의 채근에 못 이겨 마산에서 하루에 3번 맞선을 본 김영삼은 세 번째 처자인 동갑내기 손명순에게 눈길이 갔다. 맞선을 본지 며칠이 지난 뒤 거제에서 배를 타고 나와 마산을 거쳐 임시수도의 국회가 있던 부산으로 가려던 김영삼은 자신도 모르게 마산에 있는 손명순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손명순은 마산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 재학 중이었다. 전쟁 중이던 1951년 3월6일 김영삼은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이화여대 학칙은 재학생들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주변 친구들이 감싸주는 바람에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도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거제에 출마해 만 26세로 최연소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선거 당시 고무신 공장을 경영하던 장인이 사위를 돕느라고 흰 고무신 1만 켤레를 거제에 보내 문제가 될 뻔 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만 해도 고급신발이었던 흰 고무신이 온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거제 전체에 퍼졌다. 김영삼은 선거법에 걸릴 것을 걱정해 몽땅 배에 실어 처가로 되돌려 보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왜 고무신을 나눠주지 않느냐"고 항의해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다.

△수영만에서 올린 실패한 대선 깃발

1987년 6월 민주대항쟁으로 정치일선으로 돌아온 김영삼은 그해 부산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10월17일 부산 수영만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 추대대회'는 오후 3시 개최에도 불구하고 오전10시부터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해 50여만 평의 빈터와 야산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수영만 집회는 당시 김대중과의 야당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빚어진 힘겨루기의 산물이었다.

김대중이 6·29선언 이후 대선 불출마 선언을 거둬들이는 명분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인 호남 일대를 돌면서 모여든 인파를 명분으로 후보 추대를 공식화한데 대한 맞바람의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김영삼은 부산에서 가장 넓고 소위 '사진발'을 잘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보라고 했다는 것. 서면이나 광복동, 부산역 등이 당시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였지만 그 정도로는 정국흐름에 반전을 꾀하기 어렵다면서 과감하게 수영만을 택한 것. 당시 부산의 일반 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민주산악회 지부와 지지자들이 관광버스 등을 동원해 도시락까지 싸들고 몰려들었다. 당시 수영 교차로에서 해운대 방향으로의 길은 인파로 완전히 막혀버렸다. 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지역기반을 중심으로 대규모 유세를 벌인 것은 지역감정을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치적 고비마다 고향을 승부처로

그 후로도 김영삼은 정치인생의 고비마다 고향에서 백척간두의 승부를 벌였다.

1990년 10월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이 터졌다. 김영삼이 그해 초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때 내각제에 동의했고 이를 문서화했다는 합의각서가 뒤늦게 공개된 것. 민정계가 민자당 대표인 김영삼을 압박하기 위해 벌인 고도의 정치게임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김영삼은 "합의문서 공개는 처음부터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고 고사시키기 위한 정치공작이다. 내각제 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할 경우 절대 할 수 없다"며 당무 거부를 선언했다. 이에 청와대는 "내각제 문제는 연말까지 꺼내지 않겠다"며 '화해'를 요청했다.

이때 김영삼은 '당무복귀냐, 거부냐'를 놓고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주변에서는 이 정도로 끝내고 청와대와 타협 하자는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차남인 김현철과 비서관이었던 박종웅 등은 이번 기회에 단단히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김영삼에게 강경대응을 건의했다는 후문이다.

김영삼은 이를 받아들여 부친 김홍조 옹이 살고 있는 마산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내가 마산으로 간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 나에 대한 공작정치를 중단하지 않는 한 분당까지도 각오한 최후통첩"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자 노 대통령도 "마산에 가고 싶으면 가고 생각할 것이 있으면 하는 것이지 의미부여 할 게 뭐가 있느냐. 당무는 다른 사람이 대신 보면 될 것"이라며 김영삼을 압박했다.

이에 민주당 소장파를 중심으로 "아예 분당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최형우 서청원 강삼재 김운환 최기선 등 강경파들은 탈당 날짜를 잡고 기자회견까지 준비했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마산 크리스탈 호텔에서 민주계 의원 50명 전원과 지구당위원장 45명의 서명이 든 탈당서명록을 들고 배수의 진을 쳤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하는 수 없이 김윤환 원내총무를 마산으로 내려 보내 '내각제 포기 메시지'를 김영삼에게 전달했고, 노-김 두 사람의 전격적인 회동을 통해 사태는 수습국면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지역기반을 활용해 정치인으로서의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김영삼은 민자당 내 소수세력이면서도 대통령 후보를 꿰차고 대선에서 당선됨으로써 문민시대를 활짝 열게 된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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