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 + 間 (인+간)] 영원한 히피 나의 음악 나의 인생 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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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어머니도 날 버렸다…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음악만이 답이었다

'영원한 히피' 한대수(63). 부산에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보헤미안'처럼 떠돌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최근 '뚜껑 열린 한대수'란 책을 냈다.

이를 핑계 삼아 '쎄시봉' 공연준비로 바쁜 그를 만나 '나의 음악, 나의 인생'을 들어봤다. 





■불우했던 '부잣집 도련님'

"부산 하면 떠오르는 것? 많지. 바다, 갈치조림, 미역쌈, 성게, 멍게, 꿀빵… 부산 아주 좋지.(웃음)" 어느덧 환갑을 넘긴 한대수는 동래 온천장에서 태어난 부산 토박이다. 혹시 잊지는 않았을까란 기우 속에 '부산'을 묻자 마치 기억창고를 연 듯 줄줄이 어린 시절의 추억를 떠올린다.

6·25전쟁의 난리 통에는 연세대 임시교사가 차려진 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대수의 집안은 당대 세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빵빵'했다. 친가는 박사만 12명이 넘는 '학자 집안'이고, 외가는 실로암백화점, 부산진철공소, 국제시장 상점 등을 운영했던 '사업가 집안'이다. 천재 소리를 듣던 아버지 한창석 씨는 당시 드물었던 '핵물리학자'로 한대수가 태어난 지 백일 만에 미국 명문 코넬대로 유학을 떠났다. 홀로 남아 졸지에 젊은 과부가 됐던 어머니 박정자 씨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끝내 이혼을 하고 집을 떠났다.



태어난 지 백일 핵물리학자인 아버지 미국행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마저 집 나가 늘 '외톨이'

열 살 때 실종 아빠 찾아 떠난 미국서 록음악 만나…

68년 구겨신은 부츠·장발 기인 같은 풍모로 등장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된 한국 최초의 히피



형제 없이 독자로 자랐지만 한대수는 학교에선 부러움의 대상인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없이 조부모 품에서 자란 그의 생각은 달랐다. "친구들이 '야, 넌 부자라 좋겠다'고 말했지만 난 그랬죠. '너희들은 가난해도 아버진 있지만 난 아버지가 없잖아. 내가 더 불쌍한 거지.' 그래서 혹시 비행기가 날아가면 저거 타고 아버지가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곤 했어."

열 살 소년 한대수는 1958년 아버지를 찾아 조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엔 대한항공 같은 국적기가 없어 일본,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까지 팬암, 노스웨스트 같은 미국 비행기를 갈아타고 간 뒤 다시 열차로 사흘을 달려 뉴욕에 도착했으니까 꼬박 일주일 걸렸지. 지금 이렇게 가라면 누가 가겠어. 그땐 그랬어."


■신천지에서 접한 '록 음악'

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됐고 물자가 부족했던 한국과 달리 소년의 눈에 들어온 미국 뉴욕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었다. 전쟁특수로 미국 경제는 고공 행진을 했고 사람들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100층이 넘는 고층빌딩이 있는가 하면 땅속에는 지하철이 오갔다. 모든 것이 신천지로 다가왔다.

소년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백방을 수소문해도 아버지는 없었다. 그곳에서 학교에 다녔지만 학업에는 별 관심을 두지 못했다. 방황했다. 그러면서 기타를 배웠고 '록 음악'도 만났다. 미국 친구들이 그랬듯 거리에서, 학교에서 기타를 연주했고 모자를 돌리며 돈을 구걸했다.

이를 본 조부모는 한대수를 다시 한국으로 보냈다. 경남중-경남고(20회)를 다녔지만 졸업은 못했다. 재미난 사실은 한대수와 동문수학한 경남고 20회 학생 중 입법-사법부 수장을 지낸 김형오 국회의장, 양승태 대법원장이 친구라는 것. 한대수는 "'록의 대부'인 나를 포함하면 '권력 3부'를 장악한 것 아니냐"며 농담을 던진다.

뉴욕 맨해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롱아일랜드에서 아버지를 찾은 것은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였다. "FBI와 사설탐정을 동원해서 찾았는데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어. 미국여자와 결혼했고 한국말을 모두 잊어버렸고. 내 추측으로는 아버지가 브레인 워싱(뇌세척)을 당했던 것 같아. 어렵게 아버지를 찾았지만 새어머니와 마음이 맞지 않아 2년 후 헤어졌지 뭐."


한대수는 경상도 사투리가 잔뜩 배어 있는 창법으로 "물 좀 주소"라 외쳤다. 가사도 낯설었고 기타를 치다 하모니카를 부르는 것도 처음 시도한 싱어송라이터였다.



■쎄시봉에 등장한 '히피'

한대수가 서울 '쎄시봉'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무 살 때인 1968년. 팝송 번안곡이 넘쳐나던 당시 자작곡을 선보여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을 알린 그는 헝클어진 장발에 가죽 부츠를 구겨 신고 전위적인 행동을 보여줘 '히피'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어 '이별의 부산정거장' '홍도야 울지마라' 같이 뽕짝이나 트로트를 주로 부르던 때, 그는 경상도 사투리가 잔뜩 배어 있는 창법으로 다짜고짜 "물 좀 주소"라 외쳤다. 가사도 낯설었고 메시지는 꼭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기타를 치다 하모니카를 부르는 것도 이색적이었다. 외국 가수들이 그렇게 하는 건 봤어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대수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세 살 선배인 조영남은 외국곡을 바꿔 불렀고 윤형주, 김세환은 말랑말랑한 포크송만 불렀는데 내가 비트가 강한 록음악을 선보이자 다들 신기해했지. 그때 그렇게 노래를 부른 사람이 없었어."

한대수는 왜 음악에 빠진 것일까. 돌아오는 답이 뜻밖이다. "외아들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면서 늘 외롭고 고독했지. 그래서 음악을 한 거야. 아마 부모가 계셨고 형제가 있었다면 음악가가 절대 되지 않았을 거야. 기자도 생각해 보라고. 내 친가와 외가를 보면 학자나 사업가가 됐겠지. 난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음악은 하지 않을 거야."

'쎄시봉' 무대에 선 이후 그는 올해로 음악인생 43년을 맞았다. 그에게 음악은 과연 무엇일까.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음악만이 답이었다

 "아침에 화장실에서 쾌변을 볼 때 느낌이 바로 음악이야.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줬지. 예를 들어 애인과 헤어질 때 음악이 있다면 슬픔을 백만 명과 나눌 수 있지. 그럴 때 음악을 통해 슬픔은 백만 분의 1이 되잖아. 그래서 좋은 거야."


■보헤미안 같은 굴곡진 삶

사진기를 목에 건 한대수는 "책에 실린 부인과 딸의 누드사진은 내가 직접 찍은 것"이라며 파안대소하고 있다. 박희만 기자 phman@
삶은 다양했고 굴곡도 많았다.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대한민국 국전 사진 부문에서 입선한 경력도 있다. 노래로 돈을 벌긴 힘들었으니 사진 전공을 살려 일자리를 찾았다.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서 당시 3급 공무원에 준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1971년부터 3년간 해군에 복무한 뒤엔 영자신문 기자로 일했다.

 

거칠 것 없이 바람처럼 살아온 음악인생 43년 

환갑 다돼서 얻은 딸 내가 살아가는 이유 

알코올 중독 아내 수발 저녁마다 앞치마 둘러

"인생 문제는 끝 없어… 이를 풀어가는 과정이 삶 

힘들고 험난해도 인생을 즐기세요"

 

1974년 1집 '멀고 먼 길'을 발표했고 이듬해 2집 '고무신'을 발표했다. 그러나 벽돌담 위 철조망에 고무신 한 켤레가 걸려 있는 앨범 표지가 문제였다. 2집이 판매 금지가 됐고 덩달아 1집도 금지 목록에 올랐다. 한국에 온 지 7년 만에 다시 보따리를 싸서 미국으로 향했다. '보헤미안' 같은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개인사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이혼을 맛봤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때, 동갑내기 디자이너 김명신 씨와 결혼했지만 1989년 이혼했다. 1992년엔 뉴욕에서 만난 스물두 살 연하의 러시아인 옥사나 알페로바와 재혼했다. 2004년 한국에 정착했고 지독한 알코올 중독에 빠진 옥사나와의 사이에서 지금 네 살이 된 딸 양호를 낳은 것은 환갑을 한 해 앞둔 2007년이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그였지만 삶은 여전히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기자가 찾아간 서울 신촌의 오피스텔은 대여섯 평에 불과해 가족 세 명이 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부인이 걱정이다. "한번 술을 마시면 소주 40~50병을 마시고 기절해. 2주일가량 마시다 취하면 자고 일어나서 또 마시고…막을 방법이 없어."

그런데 기자가 찾았을 때, 옥사나는 무척이나 '정상'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고 있었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남편과 '뽀뽀'도 한다. "3일 전까지 완전히 뻗어 있었어. 지금 저런 모습은 나도 신기해. 그래서 지방공연 때는 꼭 데리고 가야 해. 사고 칠까 봐 집에 두고 못 가. 사실 술 마시지 못하게 하려고 공연 때 함께 가서 코러스를 시키지."


■누드 사진으로 채운 속 뜻은

최근 발간한 '뚜껑 열린 한대수'(도서출판 선)로 화제를 돌렸다. 정식으로 사진을 공부한 덕분에 책의 절반가량은 전문가 수준을 넘는 사진으로 채웠다. '화가 났다'는 뜻을 담은 책을 보면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 대한 분함을 담은 듯했다. 물론 이런 얘기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작 그는 "인생선배로서 조언과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유언장'"이라고 털어놓는다.

연극인이자 함께 방송을 하고 있는 손숙 씨의 추천사가 눈길을 끈다. "20년 넘게 방송을 진행해 오면서 십여 명이 넘는 남성 진행자를 짝으로 만났는데 한대수 씨처럼 특별하고 기이한 진행자를 만난 적이 없다. 우리말도 이해하지 못하고 띄어읽기도 되질 않았으며 목소리는 늘 잠겨 있었다. 방송 그만두겠다고 PD를 닦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청취자들이 그를 감싸고 편이 되기 시작했다. 내면이 맑은 영혼을 들여다본 것이다." 그러면서 손 씨는 "이젠 누가 뭐라 해도 그의 편"이라고 곁들였다.

근사한 사진과 함께 일기형식으로 구성된 책에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상념, 세계 곳곳을 다닌 여행기에서 '미국이 가난해진 이유' '독도냐 다케시마냐' 같은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대목도 들어 있다.

그런 가운데 두 딸(부인과 양호를 그렇게 부른다)의 누드 사진이 꽤 있다. 어린 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부인은 좀 과하지 않은 것일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달랐다. "옥사나의 젊을 때 누드 사진인데 책을 출간한다고 하자 오히려 옥사나가 적극적이었어. 지금이야 애 낳고 몸이 달라졌지만 예전에 8등신 몸매거든. 그랬더니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더 많이 실어야 한다고 하더라고."

한대수는 "의도적"이라고 했다. "인터넷을 치면 누드사진이 아니라 포르노 수준의 동영상까지 넘쳐나는데 한국에서 책에 벗은 사진을 넣으려 하니까 안 된다는 거야. 여전히 출판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야.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은 아마 대통령도 볼 걸. 웃기는 나라지. 책을 내면서 그런 금기를 깨고 싶었어."

말미에는 예쁘고 귀여운 딸 양호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양호하게 자라서 양호하게 살고, 양호한 일꾼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작명의 사연에서부터 '음악은 배고픈 직업' '결혼은 일찍 하는 게 좋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등 아버지의 솔직한 마음을 적었다. 그러면서 껄껄 웃는다. "내가 대단한 아버지 맞지.ㅎㅎㅎ"

스물두 살 어린 부인과 네 살배기 딸 양호와 함께 사는 한대수. 그는 "부모 없이 자란 기억때문에라도 이들을 두고 도망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도서출판 선 제공

 

■환희의 순간을 찾아서

'보헤미안'처럼 떠돌다 그는 2004년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궁금했다. "미국에 있을 때 짜장면이 그렇게 먹고 싶어 찾았는데 없어서 못 먹었지. 김 기자, 인간의 마지막 욕망이 무언지 알아. 물욕도, 성욕도 아니야. 식욕이지. 한국에선 내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을 수 있잖아."

또 다른 이유를 곁들인다. "내가 살아봐서 좀 아는데 미국이 천국 같지만 그렇지 않아. 나도 나이가 들었는데 특히 노인들이 대접받는 곳이 한국이야. 미국에선 애들이 마약 하려고 노인들 때리고 총 쏘며 돈 빼앗아 가. 그에 비하면 한국은 지하철에 경로석도 있고 자리도 내주고 하잖아. 한국만큼 좋은 데도 없어."

쎄시봉 공연은 올해까지 하겠단다. 예전에 비해 힘이 달린다고 했다. "내 나이 육십셋인데 우리 집이 정상이 아니야. 퇴근하고 집에 오면 보글보글 된장찌개 냄새가 나야 하는데 그때부터 앞치마 입고 또 일이 시작돼. 휴~."

그런 탓에 인터뷰 마지막 말이 귓전에 맴돈다. "테레사 수녀가 말했잖아. 문제는 끝이 없다. 이를 풀어가는 과정이 삶이다. 힘들고 험난해도 인생을 즐겨라. 다시 말해 블리스 포인트(bliss point·환희의 순간)를 늘 찾아야 해." 이날 기자는 찐빵 6개를 사 들고 갔다. 한대수는 "오늘의 블리스 포인트는 바로 찐빵"이라고 말하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김호일 선임기자 tokm@busan.com

[약력]

1948년 부산 동래 출생 (핵물리학자 한창석 - 박정자 외아들)

1958년 도미(渡美)

1968년 서울 쎄시봉 공연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 3급 공무원(디자이너)

1974년 1집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1971~73년 해군 복무

1974년 동갑내기 디자이너 김명신과 결혼, 89년 이혼

1992년 뉴욕서 22세 연하 러시아인 옥사나 알페로바와 재혼

2004년 귀국, 서울 신촌 정착

2007년 딸 양호 출생

2011년 '뚜껑 열린 한대수'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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