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20> 동해 수호신이 된 관음보살과 두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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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길 가던 원효와 의상, 그 길 모두 보살이 서 있었네

낙산사 의상대는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이 깃들어 있다는 해변의 굴 안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닦았던 곳이다.

강원도 함백산 자락의 정암사에서 자장율사의 자취를 더듬어본 뒤에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아리랑의 고장 정선을 지나서 평창의 진부면으로 들어선 차가 이윽고 이른 곳은 오대산 기슭의 월정사(月精寺)다. 월정사 또한 자장율사가 지은 절에서 비롯되었다. 절을 둘러보면서, 문득 불교의 계율·선정·지혜 삼학(三學)이 떠올랐다. 자장율사는 율법을 바로 세움으로써 신라 불교의 초석을 다졌다. 그렇다면 선정과 지혜라는 기둥은 누가 세웠을까?

월정사에서 오대산을 넘어 진고개를 지나서 양양군으로 갔다. 양양군으로 향하면서 내내 남대천을 끼고 달렸는데, 이 남대천은 양양 앞바다로 이어져 있다. 바다의 초입에 들어서는 남대천에는 낙산대교가 걸려 있고, 그 낙산대교를 지나 북쪽으로 곧장 가면 낙산사가 나온다.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미리 정해둔 숙소가 있는 속초로 향했다.

늦은 밤부터 비가 내렸는데, 아침에는 활짝 개었다. 낙산사를 둘러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으리라. 속초 청호항을 바라보며 늦은 아침을 먹고서 이내 남쪽으로 향했다. 20여 분 만에 낙산사에 이르렀다. 아직 오전임에도 벌써 사람들이 붐빈다. 다들 관음보살을 보러 왔을까. 2005년 4월 5일, 큰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음에도 이렇게 다시 번듯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 평범한 불자들 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낙산사는 관음보살의 성지다. 어떻게 해서 성지가 되었는지를 알려면, 두 고승,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의 자취를 따라가 보아야 한다. 그 자취는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에 이야기로 남아 전한다.



● 관음보살의 성지, 낙산사

원효와 의상은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숭앙받는 고승들이었다. 중국의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기가 실렸을 정도다. 잠깐 '송고승전'의 <의상전(義湘傳)>을 보면, 두 고승이 당나라로 유학하려고 했던 일이 나온다.

둘은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로 들어가려고 서해 쪽으로 갔다. 당진이나 화성 쪽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도중에 큰비를 만나는 바람에 토굴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이튿날 보니, 그곳에는 오래된 무덤의 해골이 있었다. 여전히 비가 내렸으므로 길을 나서지 못하고 다시 그곳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그날 밤, 귀신이 나타나자 놀란 원효는 "삼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로지 의식이 만든 것이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나라로 건너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랑을 메고서 신라로 되돌아갔다. 홀로 남은 의상은 유학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의 배를 얻어 탈 수 있었으므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이때가 661년이었다.

의상은 장안 근처의 종남산(終南山)에 있던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智儼)의 문하에 들어갔다. 지엄에게서 화엄철학을 두루 배운 의상은 668년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670년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이 먼저 찾아간 곳은 동해안에 있는 어떤 해변이었다. 의상이 이 해변을 찾아간 데서 <낙산이대성>은 시작된다.

의상이 그 해변을 찾아간 것은 그곳에 관음보살의 진신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관음보살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낙산(洛山)'인데, 인도에 있는 '보타락가산(寶타洛伽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보타락가산은 인도 남단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산으로, 관음보살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낙산 또한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 있고 관음보살도 살고 있으니, 잘못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 관음보살의 진신을 본 의상

그런데 의상은 왜 귀국하자마자 낙산으로 가서 관음보살을 만나려고 했는가? 그것은 의상이 중국에서 유학한 일과 관련이 있다. <낙산이대성>에서는 의상의 유학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는 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의상이 당나라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타락가산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온다. 천하의 선지식들을 두루 찾아다니던 선재동자는 보타락가산에 이르렀고, 거기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 의상 또한 선지식을 찾아서 당나라에 갔고, 거기서 지엄을 만났다. 그리고 지엄에게서 화엄의 종지를 배워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민중은 의상을 선재동자의 현현으로 여겼다. 그래서 선재동자처럼 낙산으로 가서 관음보살을 만나려 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의상은 낙산 해변의 굴 안에 산다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기 위해서 이레 동안 재계(齋戒)를 하였다. 그러자 천룡팔부(天龍八部)라는 신장(神將)들이 나타나서 그를 해변의 굴 안으로 인도하였다. 의상은 굴 안에서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왔으나, 관음보살을 보지는 못하였다. 이는 의상의 수행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또 동해의 용이 나타나서 의상에게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쳤다고 한다. 여의보주를 받아서 나온 의상은 다시 이레 동안 재계하였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관음보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해의 용은 본래 낙산 인근의 민중이 섬기던 신이었다. 이제 그 용은 천룡팔부처럼 호법신이 되어 관음보살을 시위(侍衛)하게 되었으니, 토착신이 불교의 신격으로 승진을 한 셈이다.

또 이야기에서는 관음보살이 의상에게 "앉아 있는 곳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지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 동해의 물이 부딪쳐 부서지고 있는 벼랑 위에 의상대(義湘臺)가 세워져 있는데, 의상이 관음보살을 보기 위해서 재계하며 앉았던 곳이리라. 산꼭대기는 바로 낙산이고, 거기에 지은 불전이 지금의 낙산사다.

관음보살의 진신을 본 의상은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는데, 그 금당이 지금의 원통보전(圓通寶殿)이다. 그래서 원통보전을 관음전으로도 부른다. 이렇게 창건된 낙산사는 원래 그곳에 있던 용 대신에 불법으로써 동해를 지키는 관음보살의 도량이 되었다.



● 관음보살의 화신을 만난 원효

의상이 낙산의 해변에서 관음보살을 만난 뒤, 원효가 뒤이어서 관음보살을 만나려고 하였다. 처음에 낙산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주문진과 양양군 사이에 있는 논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원효는 여인에게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하였고, 여인은 "벼가 여물지 않았다"며 장난스럽게 대답하였다.

원효는 또 어떤 다리 밑에 이르렀고, 개짐을 빨고 있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였다. 여인은 빨래하던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는 자신이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가 원효에게 "제호(醍호) 스님은 가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고, 소나무 아래에는 신 한 짝이 있었다고 한다.

파랑새가 한 말의 뜻을 알지 못했던 원효는 낙산사에 갔다. 절의 관음보살상 밑에 신 한 짝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 여인이 바로 관음보살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는 해변의 굴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풍랑이 크게 일어서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다. 원효가 들어가지 못한 그 굴 위에 지금은 홍련암이 자리하고 있다.

원효가 만난 관음보살은 의상이 만난 관음보살과는 달리 평범한 여인들이었다. 이야기에서는 그 여인들 또한 진신이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화신(化身)이었다. 진신은 곧 법신(法身)으로, 부처의 참된 몸이다. 그 진신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화신이다. 여인들은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런데 원효가 여인들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화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원효 자신의 수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뒤늦게 알아차리고서도 해변의 굴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도 그런 모자람 때문이었다. 화신을 그런 모자람을 일깨우기 위해 나타났던 것이다.



● 불국토의 상징, 낙산사와 관음보살

왜 의상에게는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났고, 원효에게는 진신이 아닌 화신이 나타났을까? 진신이든 화신이든 모두 상징이다. 결코 실상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민중은 이야기를 통해 이런 상징이 원효와 의상의 각기 다른 수행을 보여주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의상은 화엄종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의 지상사에서 화엄학의 대가로부터 그 종지를 직접 배우고 익혔다. 이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만난 것과 같다. 또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는데, 거대한 화엄철학의 세계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으로 곧 법신이요 진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원효는 불교철학이 척박한 신라에서 일정한 스승도 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요체를 터득하였다. 그러면서도 화엄학에 관한 여러 저술들을 남겼고, 화엄학의 고승으로도 숭앙받았다. 원효의 학문적 여정이나 수행 방식이 이러했으므로 진신보다 화신이 더 어울렸던 것이다.

동해의 해변에 낙산이 있고 거기에 관음보살의 진신과 화신이 나타나서 의상과 원효를 만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신라의 화엄철학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는 자장의 뒤를 이어서 두 고승이 신라를 진정한 불국토로 만드는 데 기여했음을 의미한다.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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