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9> 법의 바다에서 나루가 된 자장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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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기 위해 평생을 산 고승도 깨닫지 못하고 떠났다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 기슭에 있는 정암사의 수마노탑. 서해 용왕이 준 돌로 세웠다고 전하는 이 탑은 떠나간 문수보살을 뒤쫓는 자장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낙동강은 1천300리 물길인데,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咸白山)에서 시작된다. 함백산의 황지(黃池)가 발원지다. 이 함백산 기슭에 정암사(淨巖寺)가 있는데, 통도사를 세운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절이다. 부산에서 정암사로 가려면, 도로를 따라 가더라도 낙동강 물길만큼의 거리를 가야 한다.

토요일 오전 열 시 즈음, 고속도로에 차를 올려 노포IC를 지났다. 먼저 경북 영주 부석사로 길을 잡았다. 부석사는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데, 봉황산은 태백산 줄기의 남쪽에 있으므로 함백산에 가려면 부석사를 지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오후 한 시에 부석사 입구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한숨을 돌린 뒤, 부석사 뒤쪽으로 난 소로를 넘어서 영월 쪽으로 가다가 함백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백산 자락의 정암사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오후 네 시가 다 되었다. 부산에서 승용차로도 한나절이 걸렸다. 그런데 양산의 통도사에서 자장율사는 어찌하여 이 먼 곳에까지 와서 절을 세웠을까? 그 내력은 '삼국유사'의 <자장정율(慈藏定律)>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 통도사를 세우고 계율을 정하다

자장율사는 김씨로, 신라 진골 출신이다. 그 부친이 삼보에 귀의하여 관음보살에게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라고 빌어서 얻은 아들이었다. 법해는 바다처럼 깊고 넓은 불법을 비유한 말이다. 진량은 나루와 다리를 뜻하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대덕이나 고승을 상징한다. 이윽고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에 자장도 태어났다.

속세에 물들지 않는 성품이었던 자장은 홀로 깊숙하고 험준한 곳에서 수행을 하였다. 조정에서 자장을 불러 재상에 앉히려고 하였으나, 자장은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왕의 엄포에도 자장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하루 계율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계율을 어기면서 백 년을 살지는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결국 왕은 자장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출가를 했다고 해서 승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만 비로소 승려로서 자격과 위의를 갖추게 된다. 자장에게는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는 자장이 고승이 될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신라의 불교가 수계의 의식을 갖추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야기에서도 오계를 받은 자장이 속세로 내려오니 속인들이 다투어 와서 계율을 받았다고 하였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계법을 받음으로써 오롯한 수행자가 된다. 물론 몸과 마음으로 지극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지만, 당시는 불교가 전래된 초기였으므로 계법을 받는 일이 간과될 수 없었다. 그러했으므로 자장이 계법을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 일로 해서 계법을 갖추는 일이 긴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자장은 중국으로 건너갈 뜻을 품었고, 636년에 칙명을 받아서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산서성(山西省)의 청량산(淸凉山)으로 갔다. 청량산은 오대산(五臺山)으로도 불리는데, 문수보살의 영험이 있는 곳이다. 자장은 그곳에서 명상하다가 꿈에 어떤 중으로부터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이는 문수보살이 준 기별(記別)이었다. 기별은 부처가 수행자에게 미래에 성불하리라고 예언한 것이다. 이는 자장의 수행이 깊었음을 상징한다.

643년에 자장은 신라로 돌아왔고, 분황사에 머물면서 대승(大乘)과 계법에 대해 널리 가르쳤다. 이윽고 대국통(大國統)이 되어서 사찰들과 승려들이 일정한 법식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힘썼고, 이로써 신라의 불법은 위의를 갖추고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불법이 흥성하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에 자장은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았다.



● 수다사에서 선정에 들다

통도사는 "모든 이들을 두루 득도(得度)하게 해주는 절"이다. 승려가 되어 수행하려는 이들에게 계법을 주기 위해서 계단을 쌓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계법을 받았다고 해서 수행이 절로 되고 깨달음을 쉽사리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득도는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는 "계법을 주는 승려라고 해서 반드시 깨달은 이는 아니다"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수계 의식이 갖추어지지 않은 신라에 율장(律藏)을 들여와서 널리 가르치고 편 자장은 귀국하자마자 왕실과 귀족들, 승려들과 속인들의 존숭을 받았고, 그 덕분에 대국통이 되고 또 율사(律師)라는 칭호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장의 수행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전국의 사찰들과 승려들을 잡도리하고, 출가하려는 바람을 세운 이들에게 구족계를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자장의 득도(得道)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장정율>에서는 자장이 만년에 서울을 떠나 명주(溟州) 곧 강릉으로 갔다고 이야기한다. 서울(경주)을 떠났다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통도사를 떠난 것이다. 늘그막에라도 사람들과 일들로 번다한 곳을 떠나 조용히 수행에 전념하려던 것이리라. 자장은 동해안을 따라서 강릉의 남쪽 정동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동해를 바라보면서 내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장은 선친이 관음보살에게 약속한 "법해에서 나루가 되고 다리가 되는 일"에 대해 떠올렸으리라. 자장은 이제 법해의 나루나 다리로서 구실을 다하고 그 자신이 법해를 품은 부처가 되고자 하여 다시금 길을 나섰다. 그는 다시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간 것이다.

정동진역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괘방산이 보인다. 자장은 그 산의 중턱에 절을 세웠다. 동해의 물을 안을 듯이 서 있어서 '수다사(水多寺)'라 했다. 오늘날에는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수다사가 신라 말에 소실되자 고려 때 다시 지으면서 등명사(燈明寺)라 개칭하였고, 조선시대에 폐사가 된 것을 1956년에 중창하면서 등명낙가사라고 하였다. '낙가사'는 관음보살이 계신 '보타낙가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등명낙가사는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등대처럼 느껴진다.

이 수다사에서 자장은 꿈을 꾸었다. 오대산에서 보았던 중이 나타나서는 바닷가의 솔밭으로 나오라 하였고, 깨어나서 나갔더니 문수보살이 와 있었다.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꿈은 곧 선정에 든 것을 가리킨다. 오대산에서도 그렇게 문수보살을 만났었다.



● 정암사에서 지혜를 얻으려 하다

문수보살이 말한 대로 자장은 동해를 뒤로 하고 태백산으로 가서 갈반지를 찾았다.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갈반지라 여겨서 절을 세웠다. 지금 정암사의 '적멸궁(寂滅宮)'이 바로 그 절이었다. 자장은 여기에 머물면서 문수보살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죽은 강아지를 담은 삼태기를 메고 온 늙은 거사가 있었다. 늙은 거사는 자장을 보려고 왔는데, 시자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내쫓으려 하였다. 거사는 자신이 왔다는 말이라도 자장에게 전하라 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알리자, 자장 또한 그를 미친 사람이라 여겼다. 이에 거사는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라고 탄식하면서 가버렸다. 그 말을 들은 자장은 비로소 그가 바로 문수보살의 현신임을 알고 쫓아나갔다. 거사는 이미 멀리 가버렸고, 자장은 따라가다가 쓰러져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문수보살은 곧 석가모니불의 보처(補處)로서, 지혜를 맡은 보살이다. 따라서 찾아온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곧 지혜를 온전하게 터득하지 못했음을, 즉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깨달음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은 아상 때문이었다. 이 아상은 자장이 이미 문수보살을 만난 것에 집착한 데서 생긴 것으로, 스스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는 열 길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十丈)"는 말이 있다. 계율에 밝은 자장은 선정에도 들 만큼 수행이 깊었으나, 그만큼 깊고 큰 장애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장애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상이었으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눈앞에서 반야지혜를 놓쳐버렸다. 이는 아무리 계율을 잘 알고 지키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또 선정에 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반야지혜를 얻은 것은 아님을 일깨워준다.



● 신라 불교의 토대를 마련하다

불교에서는 삼학(三學)을 말한다.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세 가지, 즉 계율·선정·지혜가 그것이다. 이 셋은 수행의 단계이면서 서로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계율을 지킴으로써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면 선정에 든다. 선정에 들어야 비로소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자장정율>은 삼학에서 계율이 기본이 됨을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지혜가 궁극이 된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또 <자장정율>은 자장의 일생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신라 불교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도 암시하고 있다. 자장이 계율을 정한 일은 신라 불교의 토대를 다진 일이다. 이제는 지혜로써 신라 불교를 완성하는 과제가 남았다. 실제로 탁월한 고승들이 잇달아 나와서 신라 불교를 더없이 높은 경지에 이르게 했는데, '삼국유사'는 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있다.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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