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 이야기] <17> 망국의 여왕 그리고 바다의 영웅 거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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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도에 숨겨진 무너지는 제국과 떠오르는 제국의 전설

전남 진도 서남쪽 세방낙조전망대 바로 앞에 있는 곡도. 곡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가고 오는 배들이 앞뒤로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곡도는 해상권의 상징이었다. '삼국유사'에서 '거타지'는 곡도를 구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완도의 청해진을 둘러본 김에 곧바로 진도로 향했다. 완도에서 진도로 곧장 가는 버스는 없고, 해남에서 갈아타게 되어 있다. 오후 세 시에 완도에서 해남 가는 버스를 탔고, 네 시에 해남에서 진도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가 2005년에 개통된 제2 진도대교를 건너는 순간, 역동적인 모습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진도대교는 "소리 내어 우는 바다의 길목"을 뜻하는 울돌목 위에 걸려 있는데, 이 울돌목의 한자어가 명량(鳴梁)이다. 아, 명량대첩!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가로막혀 남해에서 서해로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모함으로 이순신이 파직당하면서 조선은 대부분의 전선(戰船)을 잃고 해상권도 잃었다.

이윽고 복권된 이순신은 고작 열세 척의 배로 백 서른세 척의 일본 수군을 울돌목으로 끌어들여 전멸시켰다. 1597년 음력 9월 16일의 해전이었다. 이로써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의지는 완전히 꺾였고, 전쟁의 대세도 완전히 바뀌었다.

진도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다섯 시가 넘었다. 비를 쏟아 부을 것 같은 먹구름에 날도 일찍 저물고 있었다. 진도 서남쪽의 세방낙조전망대가 목적지다. 그런데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 곡도를 구하여 영웅이 된 거타지

운 좋게도 택시기사는 진도의 문화해설가였다. 그 덕분에 전망대로 가는 내내 진도 곳곳의 전설과 내력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30여 분만에 전망대에 이르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의 바다는 쪽빛의 이부자리를 깔아 놓은 듯했다. 그 위에 무늬처럼 떠 있는 곡도(鵠島). 이 섬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

택시기사에게 이 곡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전혀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진성여대왕거타지(眞聖女大王居타知)>에 나온다.

신라의 제51대 진성여왕(?~897) 때 일이다. 아찬 양패(良貝)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려는데, 후백제의 군사들이 서해의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이 조정에 전해졌다. 이 진도가 진도(珍島)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궁수(弓手) 쉰 명을 뽑아서 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배가 곡도에 이르자 풍랑이 크게 일었고, 배는 열흘 이상이나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게 되었다. 걱정이 된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고 제사를 지냈더니,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섬에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궁수들의 이름을 적은 패쪽들을 물에 던져서 가라앉게 하여 제비를 뽑으니, '거타지(居타知)'라 쓰인 패쪽이 물에 가라앉았다. 거타지가 섬에 남자 순풍이 일었다. 홀로 남은 거타지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서 도움을 청하는데, 노인은 자신을 서쪽 바다의 신이라 하였다. 용왕이라는 말이다.

용왕이라면 바다를 주관하는 왕인데, 바다 위의 섬에서 무슨 곤란을 겪고 있을까?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陀羅尼)를 외우고서는 노인과 그 자식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그들의 간과 창자를 빼 먹는 중이 있다고 했다. 아무리 용왕이라도 가사를 걸친 중, 게다가 다라니를 외우는 중은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연 해가 뜨자, 중이 나타났다. 중은 다라니를 외우면서 노인의 간을 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화살을 쏘아 중을 맞혔다. 그 즉시 중은 늙은 여우가 되어 죽었는데, 곡도 또는 곡섬에 '과녁의 한가운데'를 뜻하는 '곡(鵠)'이 붙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노인은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 속에 넣어주면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또 두 마리 용을 시켜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의 배를 따라가게 하였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거타지는 꽃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는 함께 살았다고 한다.



● 다라니로 망국을 경고한 왕거인

거타지 이야기는 곤란에 처한 왕을 도와서 그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그 보답으로 공주와 혼인을 한다고 하는 영웅 설화와 상통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앞에 역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놓이면서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뒤에 유모인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 남편인 위홍(魏弘) 잡간 등 총애하는 신하들이 전횡을 일삼았다. 이들 권신(權臣)들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치는 문란해지고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도적들 가운데는 진성여왕 6년(892)에 완산(完山, 지금의 전주)에 웅거한 견훤(甄萱), 진성여왕 7년(893)에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에서 일어난 궁예(弓裔)도 있었다. 바야흐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다라니의 은밀한 말로 글을 지어서 길에 던졌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라는 글이었다.

다라니는 범어(梵語, 산스크리트)를 번역하지 않고 소리 그대로 외우는 것인데, 이는 근본 원리나 이치를 언어로 다 드러낼 수 없어서다. 그리하여 진실한 언어인 진언(眞言)이면서 비밀한 뜻을 담고 있는 밀어(密語)로 여겨지는데, 여기서는 예언이나 조짐을 나타내는 언어로 쓰였다.

다라니의 뜻은 "여왕과 위홍 잡간, 서너 명의 권신, 부호부인 등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왕과 권신들은 당연히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누구의 소행인지 알려고 했다. 이윽고 왕거인(王居仁)이 그랬다고 여겨서 왕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은 시를 지어 "하늘은 어찌하여 징조를 내리지 않는가?"라며 하늘에 호소하였고, 이에 하늘은 벼락을 쳐서 그를 놓아주었다.

왕거인의 이름은 '왕은 어짊에 산다'는 뜻이다. 그런 왕거인을 옥에 가두었으니, 왕은 어짊에 살지 않는다는 게 분명하다. 또 하늘이 벼락을 쳐서 왕거인을 놓아주었다는 데서도 천심(天心)이 왕에게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천심은 민심(民心)이다. 천심이 떠났으니, 이는 곧 민심이 떠났음을 의미한다.



● 거타지와 곡도의 상징적 의미

왕에게서 떠난 민심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 민심의 향방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거타지 이야기다. 거타지 이야기는 그 자체로 민중 영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진성여왕과 그 권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비유와 상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렇다. 거타지 이야기의 곡도는 신라이고, 풍랑은 도적들이고, 무능한 노인(용왕)은 진성여왕이고, 늙은 여우인 중은 전횡을 일삼는 권신들이고, 다라니는 권력이고, 간을 빼앗기고 죽은 자식들은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이다.

또 사신은 신라의 외교력이고 궁수들은 군사력인데, 곡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이는 곧 그 외교력과 군사력이 무기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거타지라는 영웅이 필요했다. 거타지는 궁수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나, 섬에 홀로 남아서 용을 구하고 곡도를 지키면서 영웅으로 거듭났다.

두 마리 용이 그를 떠받들어 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그가 진정한 영웅이었음을 서해가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해를 차지한 이가 새로운 영웅이 되어 새 세상을 열어간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거타지는 민중이 갈망한 영웅을 표상한다. 그런데 왜 거타지 이야기는 곡도를 배경으로 했을까? 곡도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바닷길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가장 오래 되고 안전한 뱃길은 남해의 해안을 따라 가다가 진도를 돌아서 서해안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간 뒤에 덕적도 앞에서 서해를 건너는 길이다. 바로 이 뱃길로 다니는 배는 반드시 곡도의 앞이나 뒤를 거쳐서 남해나 서해로 들어간다. 한마디로 곡도는 해상권을 상징한다.

용왕이 곡도에 살고 있었다고 한 데서도 곡도가 얼마나 중요한 섬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곡도가 권신들을 상징하는 중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섬이 된 것은 곧 해상력을 상실하여 쇠망으로 치닫고 있던 신라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 다툼에 눈이 멀어 멀리 내다보지 못한 신라의 왕과 조정이 초래한 재앙이었다. 문성왕(文聖王) 13년(851)에 청해진을 없애지 않았던가.



● 왕건이라는 영웅을 예고한 이야기

<진성여대왕거타지>는 왕거인을 통해 후삼국 시대(892~936)가 시작될 것임을 암시하고, 또 거타지를 통해 민중 영웅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왕건(王建)이 떠오른다. 왕건은 왕거인과 같은 왕씨다. 또 그가 궁예 밑에서 결정적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서해와 남해를 장악하여 후백제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고 또 압박을 가하면서부터였다.

게다가 첫째와 둘째 부인인 신혜왕후(神惠王后)와 장화왕후(莊和王后)는 서해의 강력한 해상세력 집안 출신이 아니었던가.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는 '고려세계(高麗世系)'로 시작된다. 거기에 왕건의 조상인 작제건(作帝建)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는데, 상선을 타고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서해의 용왕이라는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의 요청으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꼴을 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을 얻어서 장가를 들었다.

이는 오롯이 거타지 이야기다. 또 작제건은 그 이름이 '황제를 낳아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 아닌가.

작제건 이야기와 거타지 이야기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민중의 이야기가 단순히 흥밋거리로 꾸며낸 것이 아니며, 이야기에도 역사가 들어 있고 또 이야기 자체가 역사일 수 있다는 사실이리라.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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