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6> 권력욕으로 무너진 장보고와 청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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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 요새도 권력의 방패도, 탐욕 앞에선 모래성이었네

청해진. 완도를 비롯한 섬들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새다. 그러나 그 요새도 탐욕으로 말미암아 무너졌다

부산은 남해의 동쪽 끝이다. 이 부산에서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완도까지는 대략 900리, 버스로도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다. 눈도장만 찍고 오더라도 하루가 꼬박 걸린다. 그러나 그 옛날 어린 일연 스님이 경산에서 광주까지 허위허위 걸어간 것에 견주면, 버스로 여섯 시간은 대단한 호사다. 그렇지만 여섯 시간을 내내 버스에만 있는 것이 마뜩찮아서 중간에서 갈아타는 방식을 택했다.

아침 일곱 시, 노포동에서 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날씨는 쾌청했다. 순천까지는 두 시간 삼십 분이 걸렸다. 순천에서 열 시 즈음에 완도로 들어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하늘에 먹구름이 짙어지더니, 빗방울이 가끔씩 떨어졌다. 강진과 해남을 거친 버스는 정오가 지나서야 완도대교를 건넜다. 완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서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의 바다에는 크기나 생김새가 비슷한 섬들이 여럿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는지. 이윽고 청해진이 눈에 들어왔다. 앞서 본 섬들과 그 꼴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문득 어찌하여 청해진을 여기에 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해상 왕국의 근거지였던 청해진

오후 한 시가 넘어서야 완도 동남쪽에 있는 완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렸다. 버스가 왔던 길을 거슬러서 청해진이 있는 곳으로 가려니, 시내버스는 드문드문 있다고 한다. 날씨도 그렇고 해서 택시를 탔다. 시원하게 내달리던 택시는 곧 아주 거대한 동상 곁을 지났다. 한눈에도 장보고(張保皐)임을 알 수 있었는데, 크기가 무려 34m나 되었다. 완도 이쪽에서 건너편 신지도를 향해 서 있었다.

동상을 지나니 이내 장보고기념관이 나왔고, 거기서 내렸다. 맞은편에 청해진이 있었다. 청해진으로는 다리가 놓여 있지만, 물이 빠져나간 때여서 갯벌을 밟고 건넜다. 외성문을 들어서니, 바로 앞 둔덕에 내성문이 보인다. 그 내성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고대(高臺)'라 쓰인 망루가 있다. 이 고대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저만치서 완도와 신지도(薪智島)를 이은 신지대교가 보인다. 신지대교는 남해에서 청해진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걸쳐 있다.

청해진에 올라서 둘러보니, 왜 여기에 진영을 두었는지 비로소 명확해졌다. 남쪽 바다에서 청해진으로 들어오려면 먼저 완도의 끝을 약간 에돌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완도와 신지도 사이를 지나야 하는데, 적선(敵船)이라면 완도와 신지도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기 십상이다. 또 청해진의 동쪽에서 들어올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쉽지 않다. 청해진 동북쪽에 있는 고금도(古今島)와 그 동남쪽의 조약도(助藥島)가 신지도를 마주하면서 좁은 해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해진은 완도를 비롯한 많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고 육지에서도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다. 이 난공불락의 청해진을 근거지로 하여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하면서 거대한 해상 왕국을 일으켰다. 장보고의 선박이 아니면 일본의 사신들과 승려들은 당나라에 오갈 수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일본의 엔닌(圓仁, 794-864)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나서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청해진은 사라졌다. 그것은 장보고의 죽음에서 말미암으며, '삼국유사'는 그 이야기를 들려 준다.

● 권력과 손잡은 궁파

'삼국유사'에 <신무대왕염장궁파(神武大王閻長弓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목의 '궁파'가 바로 장보고다. '삼국사기'에서는 '궁복(弓福)'이라고도 하였는데, 궁복이나 궁파로 불린 것은 성씨가 없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음을 의미한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후대에 '복'자에 '장'이라는 성씨를 붙여서 부른 것이리라.(백성들이 성씨를 쓰게 된 것은 고려 이후의 일이다.) 그런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던 궁파가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제왕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그는 비극적 영웅이었다.

<신무대왕염장궁파>는 신무대왕이 왕이 되기 전에 궁파에게, "내겐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있소. 그대가 그를 없애주면 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라고 말한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신무대왕은 왕위를 찬탈하려고 궁파의 힘을 빌리려고 한 것인데, 그만큼 궁파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궁파는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갔고, 신무대왕을 즉위시켰다.

궁파의 이런 강력한 군사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신라 사람들이 해적들에게 붙잡혀 가서 노비로 팔리고 있으니 청해진을 두어서 이를 막자고 요청하였다. 이에 흥덕왕이 군사 1만 명을 주어서 청해(완도)에 진영을 설치하게 하였다.

청해진은 말 그대로 '진영(鎭營)'이다. 진영은 군영(軍營)이니, 1만이라는 군사들의 수를 감안하면 신라의 해군을 총괄하는 사령부나 마찬가지였다. 천혜의 요새에 청해진을 둔 까닭도 여기에 있는데, 이런 진영과 무력(武力)이 필요했던 것은 해적들을 상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력으로 해적들을 소탕하자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은 매우 원활해졌고, 그 해상 무역을 궁파의 청해진이 독점하면서 차츰차츰 재력(財力)도 아울러 갖출 수 있었다.

무력과 재력의 결합은 곧 강력한 세력을 의미한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쪽에서는 그 세력이 필요했으므로 궁파와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문제는 무력과 재력을 아울러 갖추면서 신라를 넘어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던 궁파가 권력으로부터 초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낱 촌부에서 출발하여 강력한 해상 왕국을 건설한 궁파로서는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궁파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았다. 기득권층은 언제나 신흥 세력을 경계하는 법이다. 더구나 궁파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니. 조정의 신하들은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에 반대하였고, 왕은 그들을 따랐다. 이에 궁파는 왕을 원망하였고, 이윽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한다면, 그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 권력에 무너진 궁파와 청해진

왕위를 찬탈하는 데 있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궁파였기에 조정에서는 그가 난을 일으킬 경우에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군사력으로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난공불락의 청해진을 먼저 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설령 궁파가 내몰려서 청해진을 버리고 신라 땅을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가 구축한 거대한 해상 왕국은 여전할 것이니, 그 또한 후환을 남겨두는 일이 될 게 뻔하다. 신무대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때, 염장이라는 장수가 등장하였다. 염장은 궁파가 저지른 불충을 홀로 감당하겠다고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응할 군사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오로지 계략으로써 궁파를 제거해야 했다. 염장은 청해진으로 궁파를 찾아가서 그 자신도 왕에게 원한이 있다고 하면서 궁파를 만나려 하였다. 왕에 대한 원망이 깊었던 궁파는 염장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이내 술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술잔을 주고받다가 염장은 궁파의 칼을 빼어서 궁파를 베어 죽였다. 이에 궁파의 군사들은 놀라서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올라갔다. 어처구니없게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궁파의 일생만 끝난 것이 아니라 청해진도 무너졌다. 해상 왕국은 덧없이 사라졌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는 문성왕(文聖王) 7년(845)에 문성왕이 궁복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으려 했고, 8년(846)에 궁복이 난을 일으키자 염장이 궁복을 죽였으며, 13년(851)에 청해진을 없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들이 모두 문성왕 때 일어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신무대왕염장궁파>에서는 이 모두 신무대왕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궁파의 죽음은 더욱더 비극적이다. 자신이 세운 왕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 권력을 탐하지 말지어다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에서 김부식은 아주 긴 논평을 실었다. 특히 당나라 때의 빼어난 시인 두목(杜牧)과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한 송기(宋祁) 등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는 장보고를 높이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인물에 대한 논평으로는 이례적이다. 더구나 김부식은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귀족이자 유학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신무대왕염장궁파>에서는 궁파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민중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였고, 일연 스님은 왜 이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실었을까? 민중들은 궁파를 배신한 영웅으로 여겼다. 궁파가 청해진을 건설한 것은 신라의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무력과 재력을 갖추고 세력이 커지면서 초심을 잃었고, 마침내 권력과 결탁하여 그 자신의 영달을 꾀하다가 도리어 권력에 배신당하였다. 이는 궁파가 민중을 배신한 것이었고, 그래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되었다.

일연 스님은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려 하였다.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라는 탐욕은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다. 무력과 재력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궁파의 탐욕도 덩달아 커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권력의 꾐에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일연은 이 모든 것이 궁파 스스로 지은 업이며 마땅히 받아야 할 과보였음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아, 탐욕이 바로 마구니였구나!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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