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5> 불교예술이 시작된 관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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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듯 빚어낸 석상, 종교와 예술의 상생

국립경주박물관 입구 근처의 뜰에 서 있는 중생사의 관음보살상. 그 모습이 이국적이다. 도래한 중국 화공이 중생사에 머물면서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바로 두 개의 석탑이 위아래로 서 있는 게 보인다. 이 석탑들을 보면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 잔디밭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만나게 된다.

연화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이 꽤 늘씬하게 잘 빠졌다.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니, 보계(寶계)가 지나치게 높다랗게 솟아 있고, 아래 입술이 위 입술보다 두툼하며, 목은 어깨에 붙어 있고, 눈매가 약간 매섭게 느껴진다.

어딘지 부드러움보다는 엄격함이 묻어나는 게, 여느 관음보살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네 여인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아서이리라. 왜 그럴까?

이 관음보살상은 낭산 기슭에 있는 중생사 근처 밭에 묻혀 있던 것을 찾아내어 이렇게 박물관에 세워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중생사와 연관이 있을 듯한데, 다행하게도 '삼국유사'의 <삼소관음중생사(三所觀音衆生寺)>에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 도래(渡來)한 중국 화공과 중생사 관음보살상

중국에 천자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웠으므로, 천자는 그 모습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빼어난 화공을 불러서 그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그런데 다 그린 화공이 실수로 붓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찍히게 되었다. 아무리 해도 고칠 수 없었던 화공은 여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붉은 사마귀가 있었으리라 생각하였고, 그예 고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림을 보던 천자는 배꼽 밑에 사마귀가 있는 줄을 어떻게 알고 그렸느냐고 성을 내며 벌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신하가 천자를 달랬고, 천자는 자신이 어젯밤에 꿈에서 본 사람의 형상을 제대로 그린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였다.

화공은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의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 천자가 보았던 그 모습과 똑같았고, 비로소 마음이 풀린 천자는 화공을 놓아주었다.

간신히 죄에서 벗어난 화공은 불법을 신봉한다는 신라로 배를 타고 건너왔다. 말하자면, 망명을 한 셈이다. 이는 천자라는 지존(至尊)이 자신에게 성을 내고 벌을 주려한 데서 위태로움을 느꼈고, 또 진정으로 자신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불화(佛畵)를 잘 그렸으므로 그런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십분 발휘할 수 있고 또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공은 누구일까? 일연 스님은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 한다"고 적고 있다. 민중들은 그 화공이 장승요일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인데, 왜일까?

장승요는 양나라 무제(武帝) 때 활동한 화가다. 양 무제는 자신을 여러 차례나 절에 시주하여 신하들이 거금을 들여서 빼내게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는 황제다. 그리고 장승요는 인도의 화법을 배워서 '몰골화법(沒骨畵法)'이라는 새로운 화풍을 수립하고 불교 인물화나 사찰의 벽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랬기 때문에 민중들은 장승요가 천자의 여인을 그린 화공이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장승요든 아니든 이 화공이 배를 타고 남해를 지나 신라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라가 양나라보다, 신라의 국왕이 양나라 무제보다 더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는 것, 그리고 신라가 진정으로 불교국가로 거듭날 나라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신라의 불교예술이 여기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윽고 신라에 이른 화공은 중생사에 머물면서 관음보살상을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서 있는 그 관음보살상이다. 이제야 이 관음보살상이 신라의 여인네와는 다른 모습을 한 까닭이 이해된다.

● 화랑을 구해준 백률사 관음보살

'삼소관음중생사는 "세 곳의 관음과 중생사"라는 뜻인데, 이때 '세 곳의 관음'이란 중생사뿐만 아니라 백률사(栢栗寺)와 민장사(敏藏寺)도 포함한다. 그래서 <삼소관음중생사>에 이어 <백률사>와 <민장사>가 나온다. 모두 관음보살의 영험을 이야기하는데, 특히 백률사는 중생사와 관계가 깊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 거기에 북산인 금강령(金剛嶺)이 있다. 이른바 소금강산(小金剛山)이다. 백률사는 이 소금강산에 있다. 527년에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내던진 이차돈(異次頓)이 목을 베였을 때, 그 목이 솟구쳐 올라서 떨어진 곳이 바로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은 백률사가 아주 작고 볼품이 없는 사찰로 남아 있지만,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을 보면 신라 때는 꽤 흥성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백률사에도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이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든 그 화공이 만들어서 안치한 것이라 한다.

693년 3월, 국선(國仙)인 부례랑은 무리를 거느리고 놀러 나갔다가 북명(北溟, 지금 북한의 원산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말갈족에게 붙잡혀 갔다. 무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왔고, 안상(安常)이라는 벗만 홀로 쫓아갔다. 그때,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고 있던 신적(神笛, 만파식적)과 현금(玄琴) 두 보물도 사라졌다. 두 보물은 부례랑과 안상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는 곧 화랑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5월 15일, 부례랑의 양친은 백률사의 불상 앞에서 여러 날 동안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향을 피우는 탁자 위에 갑자기 신적과 현금이 나타났고, 이어 부례랑과 안상도 불상 뒤에서 나타났다.

붙잡혀 간 부례랑이 말갈족인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방목하는 일을 할 때, 모습이 단정한 스님이 손에 신적과 현금을 들고 나타나서는 그를 해변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안상을 만났다.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이 타게 하고, 자신은 현금을 타고서 바다를 둥실둥실 떠갔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이른 곳이 바로 백률사의 관음보살상 뒤였던 것이다.

● 장사꾼을 구해준 민장사 관음보살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로도 불린다. '관음'과 '관세음'은 "소리 또는 세상의 소리를 보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지만, 이는 불교의 진리를 드러낸다. 소리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 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그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쉽게 듣지 못하는 소리, 그것은 마음의 소리다. 특히 이 세상의 중생은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 신음하지만, 그 괴로운 마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한다.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풀어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음보살은 그런 중생의 소리, 마음 속 괴로움의 소리를 잘 보고 살핀다. 그래서 소리를 듣지 않고 "소리를 살피는" 보살이다. 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어디에나 나타나므로 "자유자재하다"는 뜻의 관자재보살로 불리기도 한다.

화공을 위태로운 지경에서 건져준 십일면관음보살의 얼굴이 열하나인 것은 모든 중생을 두루 살피기 위함이다.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이 달렸다는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또한 뛰어난 중생 구제력을 드러낸 이름이다. 이런 관음보살의 구제를 받아서 거친 바다에서 살아난 장사꾼이 있었다.

가난한 여인 보개(寶開)에게는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춘은 상인을 따라 바다를 두루 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 모친은 민장사의 관음보살 앞에서 이레 동안 기도를 하였다. 그랬더니 갑자기 장춘이 돌아왔다.

바다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서 배는 부서지고 동료들도 모두 죽었는데, 장춘만은 오나라 해변에 닿아서 살았다.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다가 이상한 스님을 만나서 함께 동행하게 되었고, 깊은 개천 앞에서 스님이 장춘을 끼고 훌쩍 건너뛰는 순간, 신라 땅이었다고 한다.

이야기에서는 오후 네 시쯤에 오나라에서 떠나 오후 여덟 시쯤에 신라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이를 믿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장춘이 남해를 거쳐서 신라에 이르렀다는 것, 관음보살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 특히 모친의 지극한 마음이 이루어낸 일이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과 진실이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종교와 예술, 그 지극함에서 만나다

화공은 십일면관음보살을 만나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렀고, 부례랑과 안상, 장춘 등도 관음보살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이러한 사실을 믿고 이것이 전부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믿음은 언제나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일연 스님은 그 이상을 이야기해주려고 했다.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종교와 예술은 점점 멀어졌다. 이제 예술은 종교와 그다지 관련을 맺지 않으며, 스스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둘은 그렇게 떨어져 있기만 한 것일까? 종교가 훨씬 우위에 있었던 중세에 왜 종교는 예술을 만나야 했을까? 그것은 둘 사이에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공은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을 지극하게 다하였다. 그랬으므로 저절로 여인의 배꼽까지 그릴 수 있었다. 부례랑의 부모도, 장춘의 모친 보개도 지극한 마음으로 빌었기 때문에 자식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지극한 마음들이 바로 거룩한 마음이다. 일연 스님이 말하고자 한 것이 이것이다. 예술가의 정신과 수행자의 마음은 그 지극함에서 하나다.

왜 신라와 고려 시대에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한 불교예술과 탁월한 불교사상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되돌아보게 한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지극한 마음을 지닐 때,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 종교와 예술은 하나가 된다는 것.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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