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4> 물길을 빼앗긴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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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잃고 패악에 빠진 왕, 바다 잃고 패망한 나라

백제의 마지막 충신인 성충은 백강의 입구가 당나라를 막을 백제 최후의 보루라고 의자왕에게 충언했다. 그러나 백제는 강을 빼앗겨 그 빼앗긴 강에 백제의 삼천궁녀는 낙화처럼 떨어졌다. 사진은 백마강과 낙화암(오른쪽). 부산일보 DB

때는 1214년. 한 사내아이가 경주(慶州)의 장산군(章山郡)에서 해양(海陽)으로 먼 길을 나섰다. 장산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이고, 해양은 전라남도 광주다. 대략 500리 길이다. 이 길을 아홉 살짜리 사내아이가 걸어서 갔다. 지금처럼 잘 닦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험한 골짜기와 높은 산도 넘어야 하는 그 길을 걸으면서 사내아이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내아이의 목적지는 해양의 무량사(無量寺). 말하자면 아이는 승려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니 여느 풍류객처럼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으리라. 서해(西海)를 보기는 했을까? 그러나 머문 곳이, 700여 년 동안 서해를 중심으로 왕국을 유지했던 백제(百濟)의 땅이었으니, 이야기로나마 서해나 백제에 대해서 들었으리라. 그 가운데 하나가 먼 훗날 이 사내아이가 편찬한 '삼국유사' 속에 실려 있다. <태종춘추공> 속에 있는 "백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다.

● 변화를 미리 읽은 충신의 간언

춘추공은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다. 김춘추는 진덕왕(眞德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쉰이 넘었다. 그리고 8년을 다스린 뒤, 661년에 쉰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호(廟號)가 '태종'이 된 까닭은 그가 일생 동안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의 통일에 힘썼고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세상을 떠나기 전 해, 그는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멸망 이야기는 그의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태종춘추공> 안에 실린 셈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武王)의 맏아들이었던 의자왕(義慈王)이다. 용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었다고 한다.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 일컬어질 정도였으니, 그의 성품이 얼마나 빼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뒤, 갑자기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소홀히 하여 나라가 위태로워졌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 왕의 패악이야말로 왕조의 멸망을 손쉽게 설명하는 길이니. 그러나 그 안에도 진실은 숨어 있다!

성품이 강직한 신하인 성충(成忠)은 왕에게 간언하였다. 그 간언에서 성충은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시세의 변화란 곧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가리킨다. 길고 길었던 분열과 혼란의 시대, 즉 위진남북조 시대(220~589)가 수(隨)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에 의해서 종식되었고, 곧이어 당(唐)나라가 통일 제국을 이어받으면서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니, 중국 대륙의 변화는 곧 동아시아의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거듭된 고구려 원정, 당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으려 애쓰는 신라 등등. 시세를 꿰뚫어보는 현자라면 이로부터 한반도에도 안팎에서 거센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낌새를 알아챌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낌새를 알아채기는커녕, 그런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도 드물다. 의자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소홀히 여긴 것은 백제가 그런 위태로운 지경에 있지 않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이듬해(642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신라의 성들을 빼앗았다. 이는 대단한 전과(戰果)인데, 이 때문에 의자왕은 오만해져서 성충의 간언에 귀를 기울지 않았던 것이다.

● 빼앗긴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군대

성충은 특히 "적병이 오거든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간언하였다. 탄현은 당시 도성이 있던 부여의 동쪽으로, 신라에서 백제에 이르는 고개다. 기벌포는 백강(白江) 하류를 가리킨다. 백강은 지금의 금강(錦江)이니, 말하자면 장항(長項) 부근이다. 육로로 탄현을 넘어오고 수군이 기벌포로 들어서면 도성이 양면에서 공격을 당하게 되므로 이를 미리 막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군의 경우, 왜 미리 바다에서 막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성충의 간언 속에 이미 대답이 들어있다. 언제부터인가 백제는 바다에서 큰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643년에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을 맺는데, 그 이유는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이 당항성은 지금의 화성시에 해당된다. 당항성에서 서해로 나서면 곧바로 중국의 산동(山東)에 닿을 수 있다. 한마디로 당항성은 당나라와 교통하는 데 있어 요충지다. 실제로도 당항성은 당성(唐城)으로도 불렸다. 이런 당항성이 신라의 수중에 있었으니, 백제로서는 눈엣가시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라가 당항성을 차지한 뒤로 서해에 대한 제해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백제가 제해권이라도 쥐고 있었다면 바닷길을 막음으로써 당항성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터이니, 의자왕이 굳이 고구려와 화친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성충의 간언에서 바다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은 까닭이다.

660년, 마침내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렀다. 성산은 지금의 산동성 위해시(威海市)다. 덕물도는 지금의 덕적도(德積島)로, 당항성 바로 앞바다에 있다. 성산에서 서해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면 바로 덕물도에 이른다. 그런데 이 덕물도를 <태종춘추공>에서는 "신라국 서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해가 신라의 수중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6월 21일에 태자 법민(法敏)이 병선 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했다"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기록은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때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던 서해의 제해권이 신라에 넘어갔고, 그 덕분에 소정방의 군사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서해를 건너올 수 있었다. 실정이 이러했으므로 성충은 바다가 아닌 강, 바로 백강의 입구인 기벌포에서 적의 수군을 막으라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바다를 이미 잃은 백제로서는 백강이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 백강을 빼앗겨 도성이 함락되다

인체에서 '목'은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부분이다. 그래서 '길목'이나 '물목'이라는 말처럼 매우 긴요한 곳을 일컬을 때 '목'이라는 말을 붙여서 쓴다. 당항성은 신라가 서해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이었고, 결국 그 길목을 차지한 신라는 서해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런 길목을 빼앗긴 백제로서는 이제 물목을 지키는 일이 긴요했는데, 바로 기벌포가 서해에서 백제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물목이었다. 성충이 이 물목을 굳게 지키라고 했음에도 백제 조정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정방의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소식을 들은 백제 조정에서는 때늦은 논의를 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그러다가 고마미지현(古馬 知縣, 지금의 장흥)에 귀양을 가 있던 흥수(興首)에게 물었는데, 흥수도 성충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이미 성충을 배척했던 조정에서는 흥수의 대답을 듣고는 성충의 간언을 확실하게 배제했다. 바로 당의 수군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였고, 이는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

신하들은 의자왕에게, "당나라 수군이 강을 따라 들어오되 배를 나란히 하고서 오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의견들을 내놓았다. 이는 당나라 수군을 백강 양쪽에서 협공을 하자는 것인데, 전혀 지세(地勢)를 읽지 못한 것이고 조수(潮水)에 대해서도 간과한 것이다. 기벌포는 바닷물이 유입되는 백강의 초입이다. 따라서 당나라 전선(戰船)들이 조수를 이용하면 막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기벌포에서 물러서면, 소정방이 군사들의 일부를 하선시켜서 백강의 동쪽이나 서쪽을 통해 수군을 돕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도성으로 곧장 들어갈 수도 있다.

실제로 당나라의 전선들은 조수를 이용하여 전진하였고, 소정방 자신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서 성에서 30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로써 백제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고, 결국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탄식하며 달아났다. 급작스런 기습을 당했다면 일단 달아나서 회복할 기회를 엿볼 수 있지만, 전술에서 그르쳤다면 거의 회복하기 힘들다. 백제는 전술을 잘못 운용하였고, 이것으로 700여 년을 이어온 왕조는 멸망으로 치달았다.

● 역사의 바다에서 무엇을 건질까

<태종춘추공>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조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660년 6월, 왕흥사(王興寺)의 절 문으로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들어오는 것을 중들이 보았다." 이는 소정방의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상징한다.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泗 水) 곧 백강의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을 향해 짖었다." 이는 소정방의 군사들이 기벌포에서 육로로 도성에 들이닥치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조짐들에 대해 '삼국사기' <의자왕>조에서도 적고 있지만, 내용을 보면 본래는 민중들 사이에서 이야기로 전하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백제의 멸망이 바다와 강을 잃으면서 초래된 것임을 꿰뚫어본 민중의 안목, 그리고 이야기로써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그 지혜는 참으로 놀랍다. 이는 육지에서 신라의 성들을 빼앗으며 그 전과에 만족하는데 그쳤던 의자왕 및 백제 조정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기도 하다. 백제는 두 면이 바다였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 면이 바다다. 과연 이 역사의 바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여다보아야 할까?

글=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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