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3> 바다 건너온 부처님 사리와 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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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열반이 아닌 진리의 열반을 기다리다

통도사 금강계단. 여기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곳의 사리는 계율 또는 율장이었으리라.

1981년 8월 24일, 중국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120㎞ 정도 떨어져 있는 법문사(法門寺). 열흘째 폭우가 쏟아지더니, 결국 천둥번개가 쳐서 13층 팔각의 진신보탑(眞身寶塔)을 두 동강을 냈다. 그로부터 5㎞년 뒤, 탑을 철거하고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바닥에 조그만 굴이 있었고, 그 굴을 파고 내려가니 돌문이 나왔다. 발굴하던 팀은 흥분했다. 숨겨져 있던 지하궁의 입구였던 것이다.

그 속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네 개의 사리는 더없는 보배였다. 하나는 부처님의 손가락뼈, 즉 불지사리(佛脂舍利)였다. 이 사리는 영골(靈骨)이라 하는데, 바로 진신사리(眞身舍利)다. 그리고 세 개는 어떤 고승의 사리인데, 이는 영골(影骨)이라 한다. 당나라 때 여덟 명의 황제가 이 진신사리를 황궁에 맞아들여 공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온 백성이 환호하며 구경거리로 삼았다. 이는 불교가 완전히 중국 땅에 뿌리를 내렸음을 입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불교계가 타락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호들갑을 마뜩찮게 여겼던 한유(韓愈, 768~825)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써서 헌종(憲宗)에게 간하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결국 9세기 후반, 당나라 의종(懿宗)은 법문사의 지하궁을 단단히 봉해버렸다. 진신사리는 망각 속에 묻혔다. 그런데 진신사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 바다를 건너온 진신사리

'전후소장사리'는 "앞서서 또 나중에 가지고 온 사리"라는 뜻이다. 사리가 전해진 것이 한 번이 아니라는 말이다. 먼저 549년에 양(梁)나라 황제가 사신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를 몇 알 보내왔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진흥왕(眞興王) 10년조에도 "양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승 각덕(覺德) 편에 부처의 사리를 보냈다"라고 적고 있으니,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리가 '앞서서' 가지고 온 사리다.

양나라에서 보냈다고 했으니, 이 사리는 남경(南京)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의 남해를 지나서 울산항으로 들어왔으리라.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 경로로 전해진 또 다른 사리, 바로 '나중에' 가지고 온 사리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데, <전후소장사리>에서는 643년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 그리고 사리 백 알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라니!

머리뼈와 어금니, '사리 백 알'이면 부처의 유골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엄청난 보물이 어떻게 신라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 그것도 천년이 훌쩍 지나서. 일연 스님은 이를 사실이라 믿었을까? '삼국사기'에서는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고, 민중이 전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삼국유사'에 실린 것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진실이 담겨 있어서이리라.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탑, 태화사(太和寺)의 탑, 통도사 계단(戒壇)에 각각 두었다고 한다. 황룡사탑은 신라의 통일과 관련되며, 자장법사가 왕에게 아뢰어서 세워진 것이다. 통도사는 자장법사가 창건하였고, 계단을 세워서 계율을 정립하여 신라 불교의 토대를 단단하게 한 절이다. 그렇다면 태화사는 어떤 절인가? 바로 여기에 사리에 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 불경의 상징으로서 사리

중국에서 남해를 지나 울산항으로 들어오면 내륙으로 이어지는 강이 있는데, 바로 태화강이다. 이 태화강 곁에 세워진 절이 태화사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태화사 터에서 발견된 십이지상부도(十二支像浮屠)가 지금 울산의 학성공원 한쪽에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실존을 외로이 증언해주고 있다.

자장법사는 중국에 가서 청량산(淸凉山) 곧 오대산(五臺山)에서 기도하였는데, 문수보살로부터 게송과 함께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오대산 북대(北臺)의 태화지(太和池)로 갔다. 그 태화지의 '태화'를 빌어서 태화사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문수보살이 준 가사와 사리는 일종의 상징이다. 문수보살은 반야지혜의 권화(權化)다. 그렇다면 그 가사와 사리는 자장법사가 부처의 가르침, 불교의 요체를 온전하게 체득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것은 결코 사리 자체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후소장사리>는 먼저 사리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불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565년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이 경전과 논서 1천700여 권을 가지고 왔고, 이어 643년에 자장법사가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왔다고 하였다. 정확하게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것은 삼장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 <자장정율(慈藏定律)>을 보면 "자장은 신라에 아직 불경과 불상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대장경(大藏經) 한 부를 비롯해서 복이 되고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얻어서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 신라의 불교가 흥성하려면,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들, 그 경전들의 뜻을 풀이한 논서들, 부처가 정한 계율들에 관한 율장 등이 필요했다. '대장경'은 그것들을 모두 아우른 것으로, 앞서 자장이 싣고 왔다고 한 400여 상자의 삼장이 이것이다. 셋으로 나누었다는 사리는 이 삼장을 의미하리라.

<자장정율>에는 사리 이야기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리가 곧 불경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리가 무엇인가? 세존을 다비했을 때, 살과 힘줄 등 몸이 완전하게 다 타고 남은 유골이다. 세존이 입멸했을 때, 남김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그때 남은 것은 그 가르침, 그 법이었다. 그래서 불교(佛敎)요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 신룡조차 도운 대장경 전래

'열반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세존이 입멸하기 전에 아난을 비롯한 제자들은 "이제 우리의 큰스승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세존은 "내가 입멸한 뒤에는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설했던 법과 율, 이것이 너희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일깨워주었다. 세존이 입멸한 뒤, 제자들이 모여서 세존의 언행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모아 엮은 것이 바로 경전이다. 그리고 그 모임을 결집(結集)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네 차례의 결집이 있었고, 이 결집을 통해서 삼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삼장에 불교 관계의 사서(史書)까지 합쳐서 집대성한 것이 바로 '대장경'이다. <전후소장사리>에서는 자장법사가 먼저, 그리고 이어서 9세기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보요선사가 대장경을 가지고 올 때, 신룡(神龍)이 거센 바람과 파도로써 막으려 하였다가 보요선사의 정성스런 축원에 의해서 오히려 감화되어 함께 대장경을 받들고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은 절이 해룡왕사(海龍王寺)라는데,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고려 때에도 여러 차례 중국에서 대장경을 구해왔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요판대장경(遼版大藏經)'은 세 부를 가지고 왔고, 그 한 부가 해인사에 있었다고 한다. 참 기묘한 인연이다. 고려에서 11세기에 만든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리자 다시 만든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팔만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이 바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후소장사리>에는 몽고의 침입 때 부처의 어금니가 사라진 일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개성에서 강화로 서울을 옮길 때 챙기지 못했는데, 관련된 자들을 일일이 불러서 캐물었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부처의 어금니가 든 함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것은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 없어져서 다시 '고려대장경'을 조판한 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부처의 어금니는 대장경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 이제 그 사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전후소장사리>에는 또 흥미로운 말이 나온다. 바로 변신사리(變身舍利)다. 변신사리는 진신사리와 짝이 되는 것이다. 불법으로 말하자면, 진신사리는 법신(法身) 자체이며 진실이요 본체다. 반면, 변신사리는 화신(化身)이며 방편이요 작용이다. 이를 삼장에 견주면, 경장과 율장이 진신사리고, 논장은 변신사리다. 경장과 율장은 세존이 직접 가르친 법이기 때문에 바로 진신사리다. 논장은 경장과 율장에 대한 고승들의 해석이요 주석이기 때문에 변신사리다.

이렇게 사리는 하나의 상징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전후소장사리>에서는 사리뿐만 아니라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까지 등장한다. 법문사를 비롯한 중국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는 신라의 불교가 중국과 버금가거나 오히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민중은 그렇게 이해하고 이야기를 했으며, 실제로도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이제 신라와 고려의 그 사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딘가에서 법문사의 진신사리처럼 우리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다!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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