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2> 천축으로 돌아간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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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했던 '구법의 길', 그 너머에는 무엇이…

삼국유사는 천축, 인도를 마땅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적었다. 승려라면 인도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사진은 인도 불교성지인 기원정사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불자들 모습. 부산일보 DB

"사하(沙河)에는 원귀(寃鬼)와 열풍(熱風)이 심해서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가 없고 아래로는 길짐승이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없고,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메마른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법현(法顯, 337~422)이 인도에 갔다가 13년 만에 돌아온 뒤에 쓴 '고승법현전' 또는 '불국기(佛國記)'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사하를 지나면서 본 풍경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하다. 사하는 고비사막이다. 고비사막은 중국과 몽골에 걸쳐 있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막이다. 이 고비사막의 모래가 편서풍을 타고 날려서 우리나라에 온다. 그것이 황사다. '고비'는 '거친 땅'이라는 뜻의 몽골어인데, 법현의 묘사에 견주면 오히려 그 의미가 약하다.

법현은 중국에 율장(律藏)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여 예순이 넘은 나이에 인도로 떠났다. 399년, 장안을 출발한 법현은 돈황(燉煌)을 거쳐 사하를 지나고, 이어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서북 인도에 이르렀다. 법현은 인도의 곳곳을 다니며 율장을 필사하였다. 그리고 인도 남동쪽의 섬 실론(스리랑카)에서 배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중국의 청주(淸州)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때가 402년, 법현은 이미 일흔다섯이 넘은 나이였다.

● 천축으로 돌아간 승려들

1600년 전, 육로로 가서 해로로 돌아온 법현의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사투였다. 그럼에도 동아시아에서 인도로 가는 구법 여행의 신호탄이 되었다. 법현을 이어 현장(玄 ,602~664)과 의정(義淨, 635~713) 등 무수히 많은 승려들이 구법 여행을 떠났다. 오로지 불법을 구하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게는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크게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삼국유사'에도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귀축제사(歸竺諸師)>가 그것이다. 우선 제목부터 자세히 보자. '천축으로 돌아간 스님들'을 뜻한다. 제목의 '귀(歸)'는 단순하지 않다.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혼인하는 것을 '귀'라고 하는데, 마땅히 가야 할 곳이 시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일연 스님이 제목에서 이 글자를 쓴 것은 승려라면 천축, 즉 인도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일연 스님은 고려 시대의 선승이었다. 이때는 불법을 구하러 굳이 인도에 갈 이유가 없었다. 당시 인도는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흥성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라 이래로 이 땅에 불교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또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인도로 가는 구법 여행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고, 그런 여행은 전설로도 이야기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구법 승려들의 여행은 잊혀져서는 안 되는, 이 땅의 불교가 살아 있는 한은 기억되어야 할 고귀한 자취였다. 그래서 일연 스님은 <귀축제사>를 두었다.

<귀축제사>는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것인데, 56명의 전기가 있고 그 가운데 7명이 신라의 승려다.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반면 고구려나 백제의 승려는 없다. 신라 승려들의 구법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사막을 지나고 산맥을 넘은 아리나발마

인도로 떠난 승려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육로, 하나는 해로. 육로는 해로보다 더 위험하였다. 해로는 바람과 해류를 잘 타면 그나마 위험을 줄일 수 있었던 반면, 구법 승려들이 택한 육로에는 한결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려들이 택한 육로는 오늘날에도 쉽사리 지나갈 수 없는 길이다. 걸어서는 더더욱 어렵다. 흔히 비단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거대한 산맥과 광활한 사막이 가로막고 있다.

신라인으로서 가장 먼저 인도로 간 승려로 기록되고 있는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는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장안을 떠나 오천축(五天竺)으로 떠났다. 오천축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인도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아리나발마가 어떤 경로로 인도에 이르렀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장안을 떠났다고만 한 데서 육로로 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서쪽으로 만리장성을 넘어갔다. 이윽고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을 만나는데,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관문인 돈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까지 동서로 6천리, 남북으로 1천500리라는 거대한 사막 타클라마칸이다.

천신만고 끝에 사막을 지나면 파미르 고원의 남서쪽을 뻗어 나온 힌두쿠시산맥을 또 넘어야 한다. 힌두쿠시산맥은 7천m가 넘는 산들까지 수없이 많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연 스님은 육로로 인도에 간 스님들을 두고, "천축의 하늘은 아득히 겹겹산인데, 가련하게도 유사(遊士)는 허위허위 오르는구나"라고 기리는 시를 지었다. 유사는 불법을 구하러 떠난 스님들을 가리킨다. 인도는 법의 보배가 있는 곳이지만, 참으로 험난하고 지극히 멀다. 과연 구법의 길을 떠난 승려들 가운데서 그 결실을 맺은 이는 얼마나 될까?

이윽고 아리나발마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서북 인도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먼 길을 가야 했다. 그가 가려 했던 나란타사(Nalanda)는 인도의 동쪽 비하르주 남동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삼장법사 현장을 비롯해 많은 구법 승려들이 나란타사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나란타사는 불교의 요체를 배울 수 있는, 인도 불교의 중심지요 최고의 대학이었다. 아리나발마 또한 다양한 경전들과 논서들을 보고 체득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고국으로 돌아와 펼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바람도 헛되이 나란타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바다를 건너다 세상을 떠난 무명의 승려들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두 승려가 있었다. 그들은 장안에서 남쪽으로 남해(南海)로 갔다. 거기서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의 서쪽 파노사국(婆魯師國)에 이르렀으나, 병을 얻어 둘 다 죽었다. 이들이 택한 길은 남방의 바닷길이었다.

남해는 남중국해로 나가는 항구가 있는 광주(廣州)를 가리킨다. 당시 광주를 남해군(南海郡)이라 했다. 실리불서국은 스리비자야(지금의 수마트라 항구)다.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 그리고 인도 사이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서 번영을 누렸던 나라다. 말하자면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항로의 중간 지점이다. 실리불서국의 서쪽 파노사국은 수마트라 서북부의 끝에 있는 브루어(Breueh)섬이다.

브루어섬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서쪽으로 곧장 나아가서 실론(스리랑카)에 이르렀다가 거기서 북쪽으로 인도의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서 미얀마 서해안을 따라서 가다가 방글라데시를 지나 동인도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두 승려에게는 어느 길이든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브루어섬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두 승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했다. 일연 스님도 안타까움에, "달은 몇 번이나 외로운 배를 떠나보냈는데, 구름 따라 돌아온 이는 한 사람도 없어라"라고 노래하였다. 신라의 두 승려뿐만 아니라, 육로로든 해로로든 떠났던 수많은 승려들이 인도에 이르지도 못하고 죽거나 이르렀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어찌하여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천만한 길을 떠났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목숨조차 기꺼이 내던지게 만들었는가?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 부처의 가르침으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건지는 것, 바로 그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일연 스님도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르며 석가모니의 교화를 보려고 인도에 갔다"고 썼다.

● 다시 살아나야 할 이야기

<귀축제사>는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전기에서 끌어온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민중들이 그들 구법 승려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들 가운데 돌아와서 그 여행에 대해 들려준 이가 없었고, 그 여행의 결과로 얻은 깨달음으로 교화를 펴서 중생들을 구제해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로 돌아갔으나, 되돌아오지 않은 승려들. 민중은 그들의 경험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니, 그들 돌아오지 않은 승려들에 대해 어찌 이야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일연 스님은 왜 그들의 행적에 대해 글로 남기려 했는가? 잊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고, 다시 되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연 스님은 이를 글로써 남기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다시 민중에게 이야기해줄 것이라 여겼던 것이리라. 그러면 저 돌아오지 않은 승려들이 민중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써 되살아날 것이고, 되살아난 그 이야기는 관념에 사로잡혀서 타성에 젖은 먼 훗날의 지식인들이나 수행자들에게 새로이 일깨움을 줄 것이다. 이제 이 짧은 글은 일연 스님의 뜻을 받들어 이렇게 이야깃거리를 내놓는다. 이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의 작용이리라! 글=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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