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0> 유교 이념에 묻힌 여인, 김제상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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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목숨 바친 가장, 국가가 왜곡한 가족의 비애

박제상은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적혀 있다. 그는 왕족이었으니까 김씨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민중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이곳 강원도 화진포는 김제상이 눌지왕의 아우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보해를 데리고 빠져 나온 곳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고성군

노포동에서 울산 가는 버스를 타고 울산대학교를 지나자마자 내렸다. 무거동이다. 거기서 좀 더 가니, 삼호지하차도가 나왔다. 곁에 태화강이 흐르고 있다. 무거동과 삼호동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범서면이었다. 범서면은 신라 경덕왕 때 하곡현으로 불리었다. 태화강을 끼고 오가는 봉계행 버스(802번)를 탔다. 시원하게 달리는 차창 밖으로 국수봉이 솟아 있다. 바로 그 아래에 은을암(隱乙巖)이라는 바위가 있다고 한다. 은을암은 '새가 숨은 바위'를 뜻하는데, 그 새는 박제상 부인이 망부석이 되자 그 영혼이 변한 것이라 한다. 국수봉 남쪽 끝자락이 범서읍이다.

아래하리에서 버스를 내렸다. 동북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봉우리가 보인다. 바로 치술령이다. 그쪽을 바라보며 30여 분 걸으니, 박제상기념관이 나왔다. 기념관 곁에는 치산서원이 있다. 서원의 동북쪽 너머로 치술령이 솟아 있다. 이 서원은 본래 사당이었고, 신모(神母)가 된 박제상 부인을 모셨던 곳이다. 조선조에 사당을 서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왜 부인은 신모가 되었는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인질로 간 왕자들

'삼국유사'에 <내물왕김제상(奈勿王金堤上)>이 나온다. 널리 알려진 바와 다르게, '박제상'이 아니라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 박제상으로 알려진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랐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 쪽 기록이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왜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김제상'이라 하였는가? 민중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 박혁거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족 출신이다. 민중이 혼동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전승하던 민중에게는 박씨나 김씨나 모두 신라의 왕족이었으니, 성씨를 무엇으로 하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성씨를 쓰게 되었고, 그것이 김씨였던 것이다. 13대 미추왕이 처음으로 김씨로서 왕위에 오르고, 17대 내물왕(356~402년 재위)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이으면서 박씨와 석씨는 잊혀져갔던 것이다.

내물왕 때부터 신라는 정치와 사회에서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시작은 미약했다. 그런 만큼 시련을 적지 않게 겪었는데, 내물왕의 두 아들이 각각 왜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된 데서도 드러난다. 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와서 왕자 한 명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왜인들의 잦은 침입을 받으면서 국력이 소진되어 가고 있던 신라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내물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美海)를 보냈다. '삼국사기'에서는 실성니사금(實聖尼師今)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미사흔이 곧 미해다.

다시 눌지왕 때, 고구려의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 왕의 아우인 보해(寶海)가 지혜와 재주가 남다르다고 하니 사귀고 싶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는 화친을 하고 싶다는 말이지만, 속뜻은 인질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내물왕 때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으로 가야의 군사들을 물리치면서 고구려의 속국처럼 되어버린 신라로서는 역시 거절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보해를 복호(卜好)라고 적고 있으며, 실성니사금이 인질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실성니사금이 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고 했을 때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던 일에 대한 복수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그런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내물왕이나 눌지왕이 보낸 것이라고 하면, 부자 또는 형제 사이의 슬픔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 슬픔은 국력의 미약함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더욱 깊어진다. 민중은 사실적 차원이 아니라 정서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또 다른 진실을 담아냈다.

● 왕의 그리움과 신하의 충렬

국력이 미약해서 왕자들을 인질로 보냈으니, 그 안타까움과 그리움은 더욱 컸으리라. 425년, 눌지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아버님이 미해를 인질로 보낸 것은 백성의 일을 지극하게 생각한 까닭이고, 자신이 보해를 보낸 것은 이웃 나라가 강성하기 때문이다"라고. 백성의 일을 지극하게 생각했다는 것도 기실은 국력이 미약했다는 뜻이다.

눌지왕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아우들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신라는 인질을 돌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계책을 세워서 일을 이룰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추천을 받은 이가 바로 김제상이었다. 지혜와 용기를 아울러 갖추었을 뿐 아니라, 바다에 대해서도 잘 알았던 인물이었으리라. 왕을 만난 김제상은 곧바로 변복을 하고 북해(北海)의 길을 통해 고구려에 갔다. 북해의 길은 곧 동해의 바닷길이거나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이었을 것이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몰래 가서 도망할 날짜를 정하고, 5월 15일에 고성(高城)의 포구에서 기다렸다. 그 포구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략 화진포 근처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도망쳐 나온 보해를 김제상은 배에 태우고 곧장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보해를 본 눌지왕은 더욱 미해가 떠올랐다.

"임금에게 걱정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한다"고 여긴 김제상이었다. 김제상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율포(栗浦)로 달려갔다. 김제상은 먼저 왜왕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틈을 노렸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날, 김제상은 미해를 배에 태워 떠나게 하였다. 이때 강구려(康仇麗)라는 신라 사람을 딸려 보냈다. 어린 나이에 인질이 되어 갔던 미해가 신라로 가는 바닷길을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왕의 회유에도 김제상은 신라의 신하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참으로 대단한 충성이요 절개였다. 그래서 오늘날 그를 '충렬공(忠烈公)'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충렬'이라는 칭호에 가려진 여인의 사랑이 있고, 깊어진 여인의 한이 있다.

● 유교 이념에 가려진 여인의 한

미해가 돌아오자 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나라 안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김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고, 그 딸을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왕의 근심이 해소되었으니, 잔치를 베풀 만하다. 그리고 김제상의 공이 컸으니, 그 아내와 딸을 높이는 것도 마땅하다. 그러나 이 모두 왕의 생각이고 지배층의 논리일 뿐이다.

'삼국사기'의 <박제상열전>을 보면, 왕이 형제를 만난 기념으로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면서 스스로 '우식곡(憂息曲)'을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우식'이란 "근심이 사라졌다"는 뜻인데, 왕이야 신하 덕분에 근심이 사라졌겠지만 그 신하의 아내와 딸의 슬픔은 어떻게 위로해 줄 것인가? 신하와 백성들 모두 왕의 소유요 왕을 위한 존재였던 왕정 시대였으니, 어떻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고구려에서 돌아온 김제상이 곧장 율포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말을 타고 뒤쫓아 갔지만, 배는 이미 떠났다.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내물왕김제상>의 말미에는 <박제상열전>에는 없는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처음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은 망덕사(望德寺) 남쪽 장사(長沙)에 드러누워 길게 부르짖었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그리움에 사무친 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동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부인과 딸들의 눈에 비친 그 바다, 왕에게는 아우를 데려다 준 그 바다. 둘은 같은 바다이면서 달랐다. 왕에게는 안도의 바다였고, 여인에게는 탄식의 바다였다. 과연 왕이나 지배층은 짐작이나 했을까? 여인의 한이 바다만큼 깊었으리라는 것을.

● 한풀이로서 민중의 이야기

아마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그랬으니 그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자신들의 지배 논리에 따라 '정절부인(貞節夫人)'이라 일컬었다. 도대체 한 여인의 그리움과 한을 어떻게 '정절'이라는 건조한 말로 재단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유교적 관념의 소산이다. 유교가 중세에 동아시아 문명의 발전에서 기여를 한 바도 있지만, 문제는 여성을 소외시킨 지배층의 이념이요 남성의 논리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여인의 한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그 한은 풀지 못했을까? 아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역시 소외되었던 민중이 풀어주었다. 이야기라는 굿으로 말이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부인은 치술신모가 되고 사당에 모셔졌다. 그 사당이 지금의 치산서원이다. 이는 여인의 한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한을 풀어준 일종의 '오구굿'이다. 지금은 치술령 꼭대기에 '신모사지(神母祀址)'라 적은 빗돌이 서 있고, 바로 그 아래에 망부석이 있다. 이 또한 하나의 이야기요 굿이다.

그런데 사당을 서원으로 바꾸었다. 서원은 유교 이념을 구현하는 곳이다. 이야말로 횡포요 폭력이다. 유교 이념의 희생자인 부인을 다시 그 이념으로 짓밟은 셈이다. 이는 여인의 절절했던 마음을 끝내 외면한 것이고, 민중의 소박한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짓이다. 근대에 사는 우리도 이를 묵과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다시 이 버젓한 서원 대신에 작고 소박한 사당을 두어 해마다 굿판을 벌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유교는 상층과 남성 중심의 논리와 윤리를 제공했으므로 하층과 여성을 껴안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유교를 대신하여 더 크고 넓게 아우를 수 있는 철학이나 종교가 필요했다.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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