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9> 철강과 철학의 조화, 황룡사장륙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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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빈 터에 남아 있는 삼국통일의 이유

신라시대 동축사에는 인도 아쇼카왕 시대에 실어 보냈다는 세 불상이 800년의 세월을 거쳐 모셔졌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가야에서 싣고 온 것이었다. 울산 염포바다 인근에 있는 이 자그마한 동축사를 '동쪽의 천축'이라고 자부했던 신라인의 기상이 새삼스럽다.

며칠 동안 구름과 비 때문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던 햇살이 아침부터 눈부시다. 마침 토요일이기도 해서 일찍 아침을 챙겨 먹고는 길을 나섰다. 노포동에서 울산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덕계, 웅상을 거쳐 율리를 지났다. 어느새 울산 시내로 들어섰다. 조용한 게 공업도시 같지가 않다. 그러나 삼산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방어진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갈아타니, 풍경이 달라졌다.

버스는 울산항 앞으로 흐르는 명촌천을 따라 내달렸다. 차창 바깥으로 자동차 선적장이 보인다.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가 선적을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다. 선적장 반대편에는 굴뚝들이 우뚝 서 있다. 울산이 공업도시임을 새삼 느낀다. 울산이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국의 산업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런데 1천500년 전에도 이곳이 신라를 강대국이 되게 한 전초기지였음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 동쪽의 천축, 동축사

자동차 선적장을 지나면 이내 성내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염포삼거리다. 이 삼거리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염포(鹽浦) 삼포개항지'라고 쓰여 있다. 조선조에 부산포(釜山浦), 내이포(乃而浦)와 함께 일본과의 교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바위 뒤로 길게 능선이 이어져 있는데, 마골산이라 한다.

이 마골산을 왼쪽으로 끼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니, 남목동이다. 거기서 내려 길을 건넜고, 남목초등학교를 지나서 감나무골공원까지 갔다. 마골산의 오른쪽 자락인데, 바로 거기에 '동축사(東竺寺)'를 가리키는 표식이 있다. 표식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니 계단이 나왔고, 계단을 다시 5분쯤 오르니 그 끝에서 백구(白狗) 한 마리가 맞아준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 백구는 절간 삼년에 한 소식 했을까? 무심하게 오는 손님을 맞는 품이 그럴 듯하다. 백구가 지키고 있는 이곳이 바로 '동축사'다. 그 이름은 '동쪽의 천축에 있는 절'이라는 의미다. 왜 '동축'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삼국사기'에 <황룡사장륙(黃龍寺丈六)>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573년 또는 574년의 일이다. 바다 남쪽에서 큰 배 한 척이 떠와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닿았다. 사포는 지금의 '염포'다. 이 배에는 철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이 실려 있었다. 서축(西竺), 즉 서쪽의 천축인 인도에서 아쇼카왕이 불상 셋을 만들려다 실패하자 그 재료를 배에 싣고는 "인연 있는 국토에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비노라"는 기원과 함께 띄운 것이었다. 그리고 800여 년 만에 사포에 닿았던 것이다.

배에는 한 부처와 두 보살의 상도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모형이었다. 하곡현의 관리가 왕에게 이 일을 아뢰자 왕은 그 고을 동쪽의 높고 메마른 땅을 골라 절을 세우고 세 불상을 모시게 하였다. 그 절이 바로 동축사다. 동축사는 신라가 서축 아쇼카왕의 기원이 이루어질 "인연 있는 땅"임을 명백하게 선언한 절이다.

● 철이 들어오던 염포

동축사에서도 동남쪽으로 멀리 바다가 보인다. 동축사에 처음 모셔진 세 불상은 그 바다로 들어왔으리라. 그래서 포구를 찾아 나섰다. <황룡사장륙>에서 '사포'라 했던 염포. 차를 타지 않고 걸어 가기로 했다. 다시 남목동으로 내려와서 아까 버스로 넘어온 고갯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동축사에서 한 시간 가량 지났을까? 염포삼거리를 지나서 성내삼거리에 이르렀다. 거기서 오른쪽으로는 자동차선착장이어서 어림잡고 왼쪽으로 길을 잡았다.

15분 정도 더 걸으니 '염포'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염포부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바로 왼쪽에 조선소가 있는데 거대한 배가 떠 있다. 문득 "참으로 기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400여 년 전, 이 바다로 인도에서 띄운 배가 철과 황금을 싣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철로 '황금 같은' 배가 만들어지고 다른 나라로 수출되어 나가고 있으니.

그런데 이야기 속의 그 배는 정말로 아쇼카왕이 띄운 것이었을까? 어떻게 800년이나 바다에서 떠돌다가 이 포구로 들어섰을까? 어찌하여 진흥왕 때였고, 하필이면 황룡사가 창건된 뒤였을까? 민중의 이야기는 사실보다 진실을 들려준다. 그리고 역사가 놓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숨겨진 역사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와서 경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황룡사에 가기 위해서다. 버스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울산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메카다. 자동차는 철강 산업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그 철강 산업의 원재료는 이미 6세기에 염포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 장인들은 그 철로써 황룡사의 장륙존상을 빚어냈다. 지금은 그 장인들이 경주가 아닌 울산에 있는 셈이지만.

● 철강과 철학이 빚어낸 장륙존상

진흥왕 때 신라는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고, 북쪽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까지 진출하였다. 그때 남긴 '북한산순수비'와 '마운령비' 등으로 입증된다.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과업은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법흥왕이 다져 놓은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법흥왕은 517년에 병부(兵部)를 설치하였고, 524년에는 남쪽 국경을 순행하면서 땅을 넓혔다. 이윽고 532년에 금관국(가락국)의 왕이 왕비 및 그 아들들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단순히 군사력을 갖추는 데만 힘쓴 것이 아니었다. 520년에 법령을 반포하였고, 528년에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시행하였다. 정치와 문화에서도 혁신이 있었다.

금관국의 항복은 신라에게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철의 생산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철과 관련된 기술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해의 해상권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렇다면 진흥왕 때, 염포를 통해 들어온 그 배는 실제로 인도 아쇼카왕이 보낸 배가 아니었다. 가야 지역에서 철을 싣고 온 신라의 배였다.

그렇다면 왜 인도, 게다가 아쇼카왕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불교 그리고 통일 때문이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행된 불법은 진흥왕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진흥왕 때인 544년에 흥륜사가 낙성되었고 또 출가하여 승려나 비구니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누구든지 승려가 되어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549년에는 유학승 각덕이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서 돌아왔다. 양나라는 남조에서 가장 불교가 흥성한 나라였다. 565년 남조의 진(陳)나라에서 불경 1천700여 권을 보내 왔다. 남조와의 교류는 당연히 남해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566년에는 기원사(祈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낙성되고 황룡사도 완성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불교라는 보편적인 종교 또는 철학이 신라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574년 3월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주조되었다. <황룡사장륙>에서는 그 일이 "단번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단번에'라는 말은 철의 제련 기술과 불교 철학의 결합이 절묘하게 또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인도에서 불교도들에게 이상적인 왕으로 칭송되었던 아쇼카왕조차 이루지 못한 것을 신라에서는 이루어냈다는 말이다. 물론 아쇼카왕은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이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장륙존상은 "철강과 철학의 조화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 열반에 든 장륙존상

황룡사는 월성 동쪽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태를 볼 수 없다. 웅장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터만 남아 있다. 한가운데에 신라 삼국통일의 상징이었던 구층탑을 떠받쳤을 초석들이 남아 있고, 거기서 북쪽으로 바로 앞에 금당 터가 있다. 넙적한 바위만 셋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한 부처와 두 보살의 장륙존상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황룡사장륙> 뒤에 나오는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에는 신라 사람들이 만든 불상을 보고 당나라 대종(代宗)이 "신라 사람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지 사람의 기교가 아니다"라고 탄복하는 대목이 나온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하늘의 조화(天造)'라고 했겠는가. 장륙존상이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하늘의 조화' 탓이 아닐까? 그 조화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한 셈이니 말이다.

황룡사장륙존상은 석가모니처럼 열반에 들었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주고 있다. 다만 그 가르침이 경전이 아니라 민중의 이야기로 남아 전하기는 하지만. 장륙존상은 신라가 어떻게 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무력만으로는 강대국이 될 수 없으며 철학을 바탕으로 한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장륙존상이 만들어진 뒤로 100년 만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 가야를 포함한 네 나라 가운데서 가장 후진이었던 신라가 말이다. 그리고 그 100년 사이에 신라의 불교 철학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러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해를 건너야만 하듯이, 그 경이로움은 아쇼카왕의 배가 오랜 세월 거친 바다를 헤치고 신라에 이르렀던 것과 같은 그런 과정을 겪고서야 나온 것이다.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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