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5> 업보 씻으려 바다에 누운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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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부른 영웅, 죽어서야 미소를 배웠네

보리사(菩提寺)의 석불좌상. 보리사는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 남산신성은 사라지고 석불좌상의 미소만 남았다. 이 미소가 민중이 바라던 정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토함산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감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꾸불꾸불 한참을 내려가니 너른 들판이 나오는데, 토함산 자연휴양림이다. 눈이 다 시원하다. 그곳을 지나쳐서 가면 첫 번째 길갈래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추령터널을 지나 덕동호를 거쳐 보문단지로 가게 된다. 감포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꺾어야 한다. 그렇게 조금 더 가면 다시 길갈래가 나온다. 왼쪽으로 꺾으면 감포로 빠지게 되는데,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오른쪽으로 곧장 간다. 그러면 감은사지(感恩寺址)가 나오고, 이윽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봉길해수욕장이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 아래, 커다란 바위가 저만치 바다 위에 누워 있다. 파도가 잔잔하니,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그렇게 잠들어 있는 바위, 그 바위가 바로 문무대왕의 수중릉이다. 숲 속의 공주는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났다는데, 이 문무왕은 누가 어떻게 깨워줄 것인가? 이제 민중이 남긴 이야기로 그를 깨워보려 한다.

· 통일 그리고 업보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과업을 시작한 김춘추의 맏아들이다. 문무왕은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평정할 때 태자로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왕위에 올랐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삼국통일의 시작을 열면서 등극을 한 셈이다.

문무왕은 21년 동안 재위했는데 그 가운데 16년은 통일 전쟁의 기간이었다. 백제 유민들과 거듭 싸워야 했고 또 고구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당나라의 야욕을 또 상대해야 했다.

문무왕은 참으로 자긋자긋한 전쟁 속에서 통치하였다. 이윽고 당나라 군대를 패퇴시킴으로써 오롯한 통일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결코 위대한 승리가 아니었다. 병법에서 최상책은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다. 그런데 참 많이도 싸웠다. 그것은 곧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들의 목숨과 통일, 과연 어느 것이 더 귀한가? 목숨이야 언젠가는 사그라질 것이지만 통일은 분열과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더 많은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은 죽기 전에 긴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그 유언은 자신이 서쪽(백제)과 북쪽(고구려)을 정벌하여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자부심, 백성들이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는 떳떳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 땅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고 하였다. 그 유언대로라면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인데 과연 그럴까?

'삼국유사'의 '문무왕법민' 조에서는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민중이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왕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였고, 그 까닭은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고, 또 추한 과보로 짐승이 되는 것이 뜻에 맞다"는 것이었다. 왕이 말한 '추한 과보'는 곧 전쟁으로써 지은 업보, 수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몬 업보를 가리킨다. 그런 죽음 한가운데서 오랜 세월을 신음해야 했던 민중은 왕이 결코 위대한 일을 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 업보를 씻어주는 바다

'삼국사기'에서나 '삼국유사'에서나 문무왕은 그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긴 유언을 통해서는 그렇게 한 까닭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어찌하여 지식인은 알지 못 했던 까닭을 민중들은 알았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지식인들도 처음에는 알고 있었으나,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리라.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하였는데 중세에 용은 그저 토착신앙의 대상일 뿐이었다. 불교에서 보자면, 그것은 축생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나라를 지킨다는 고상한 목적과 의도를 지녔다고 해도, 용은 해탈하지 못 하고 윤회를 거듭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용이 되겠다는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과응보에 따른 것일 뿐이다.

통일이라는 과업은 세간에서나, 그것도 제왕이나 지배층에서나 가치 있는 일이지, 불교에서는 그저 하찮은 일, 탐욕이 부른 망상일 따름이며 민중들로서는 고역 가운데 고역이었다.

민중이나 중생은 돌보고 구제해야 할 대상들인데 오히려 전쟁 속으로 내몰았으니 그 업보는 또 얼마나 크겠는가?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더해주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아닌 유교를 내세우더라도 제왕이나 지배층은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해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왕이다. 백성이야 고작해야 제 자신이나 이웃을 괴롭히지만 제왕은 온 나라 사람들, 천하 사람들을 괴롭히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얼른 고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고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해 속에서 법해(法海)를 찾는 일이다. 불법(佛法)의 바다, 지혜와 자비로 가득한 바다, 그 바다만이 비로소 고통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문무왕이 바다에 누운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신라의 왕들이 머물었던 월성(月城)에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바로 남산이다. 남산은 그 자체가 불국토(佛國土)다. 곳곳에 불상들과 석탑들이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거룩한 산이었고 전래된 뒤에도 여전히 거룩한 산이었다. 남산에서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인공과 자연, 불교와 토착신앙 등의 차별이 없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 그것이 불법이 가르친 바요, 민중들이 염원하던 것이다.

문무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 남산에 장창(長倉)을 설치하여 곡식과 병기를 쌓아두었다. 남산성도 수리하였다. 경주 서쪽에 처음으로 부산성(富山城)도 쌓았다. 이 모두 전쟁을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도 성곽을 쌓으려고 하였는데 의상법사가 말렸다.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재앙을 씻고 복이 절로 오게 할 수 있으나,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 하면 만리장성을 쌓아도 재앙을 없애지 못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고 한다.

이제 남산에 올라가보면 문무왕 때 수리한 성 즉 남산신성(南山新城)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아주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비로소 눈에 띈다. 아,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전쟁에 대비하고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려고 했건만 그 모두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한가로이 산길을 걷는 사람들은 여기에 성을 쌓았는지, 장창이라는 창고가 있었는지, 알지도 못 하고 관심도 없다. 그저 역사의 흔적을 알려고 하는 학인들이나 관심을 가질까?

그런데 불상들과 석탑들을 만나면 누구나 발걸음을 멈춘다. 아니, 일부러 그곳을 찾아서 간다. 왜일까? 그저 유적이고 유물이기 때문인가?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하나같이 무언지 모를 민중의 숨결,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다. 억압도 핍박도 없고 차별도 고통도 없는 세상을 그렸던 민중의 꿈,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 숨쉬고 있다. 그 꿈을 민중은 곧잘 이야기 속에서 이루고는 했다.

'문무왕법민' 조에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덧붙어 있다. 그것은 왕의 동생인 거득공(車得公)―'삼국사기'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인물―에 관한 일이다. 왕은 거득공에게 재상이 되어서 백관을 통솔하고 천하를 다스려달라고 하였다. 이에 거득공은 국내의 부역이나 조세의 사정, 관리들의 청렴함과 탐오함이 어떠한지를 살펴본 뒤에야 관직을 맡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사의 차림을 하고 서울을 떠나 각 지방을 두루 다녔다. 그렇다, 정치는 오로지 백성의 안위를 살피는 일이다. 적어도 민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실천한 제왕이나 지배자들은 얼마나 되었던가?

· 민중에 의해 거듭난 제왕

'삼국사기'에서는 "속설에서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왕이 용으로 변했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속설, 즉 "속된 설"이라고 하였다. 이야말로 민중의 속내를 전혀 알아채지 못 한 지배층의 논리요, 진실은 그저 사실을 서술한 데에만 있다고 하는 지식인의 편견이다.

'문무'는 "문화와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의미에서 붙은 시호다. 그런데 과연 문무왕은 그런 제왕인가? '삼국사기'에 서술된 문무왕의 면모는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통일을 이룬 제왕이다. 이는 무위(武威)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이 그런 점만 부각시켰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문무왕 자신이 실제로 그런 면모를 더 지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문무'라는 시호로써 일컬은 데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민중이 대신해주었다. 바로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지배층과 지식인들에 의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칭송받는 왕, 그러나 통일이라는 고귀한 목적(?)에 집착하여 숱한 목숨을 돌보지 않은 왕, 고해에서 끊임없이 고통의 격랑을 일으켰던 왕, 그 왕을 위해서 민중은 '이야기'라는 재를 올렸다. 생전에 지은 업을 씻으라고 용이라는 축생으로 만들어 저 바다에 눕혔다. 날마다 쉼 없이 드나드는 물결로, "통일에 대한 집착"이 만든 번뇌와 업보를 말끔하게 씻으라고 말이다. 글·사진=정천구/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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