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 <251> 제주 돈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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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휴식 끝 … '화산석의 검은 비경'을 마주하다

1천700 고지에 이르자 한라산 남벽이 우람하고 신령스런 모습을 드러냈다. 4월 말부터 털진달래와 철쭉이 피기 시작하면 더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뭍사람들 마음 속의 이어도는 제주도다. 매년 노란 유채꽃이 소식이 올라오면 괜히 엉덩이가 들썩대곤 했다. 하지만 막상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연말 한라산 돈내코 코스가 15년 동안의 휴식을 끝냈다. 얼른 달려가고 싶었으나 겨울 한라산은 눈이 주인공이다. 어서 봄이 오길 기다렸다. 봄을 맞은 돈내코 한라산 남벽을 찾았다. 돈내코는 15년 만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귀포에서 한라산을 등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돈내코 코스이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돼지의 꼬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단다. 입담 좋은 택시 기사는 "제주도는 입장료를 받으려 하고, 맘씨 좋은 서귀포 사람들은 받지 말자며 '돈내고~ 말고' 시비가 붙다가 이름이 그리 되었다"고 웃는다.

검은 화산석에 흰 글씨로 '돈내코 탐방로'라고 새겨 놓았다. 탐방로 입구~밀림지대~썩은 물통~적송지대~살채기도~둔비바위~평지궤 대피소~남벽 앞~방아오름 샘터~윗세오름 휴게소~병풍바위~영실 탐방안내소까지 13.5㎞를 6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돈내코 표지석을 지나 공원묘지를 통과하면 15분만에 탐방안내소에 도착한다. 삼나무 군락이 울창하다. 평지궤 대피소까지 등로 중간에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채비를 단단히 챙기고 20분을 걷자 바로 밀림지대다.

잎이 손바닥만하게 넓은 굴거리나무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제주도에만 있던 나무인데 지금은 중부지방까지 올라갔단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떴건만 아직 어두운 기색이다. 숲 그늘에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밀림지대 돌안내판에서 10분을 걸으니 해발 700m 이정표가 있다. 돌이끼가 덮여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국립공원이 관리하는 등산로여서 그런지 안내 표지는 확실하게 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사람 키 보다 훨씬 높은 지점에 빨간 리본과 줄이 매여 있다는 것. 폭설이 내려 길이 눈에 파묻혀도 등로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란다.

짙은 나뭇잎을 가진 돈나무와 지네발 같은 덩쿨식물이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길을 10분 쯤 더 가자 썩은 물통이 나온다. 버섯 재배 농민들이 용수를 쓰기 위해 만든 것이 그리 되었단다. 주둥이가 둥글고 눈이 툭 튀어나온 제주도롱뇽이 알을 한껏 실어 놓았다.

화산석으로 깔아놓은 등로를 가볍게 오르내리길 20여 분. 적송지대다. 숲의 천이는 활엽수가 득세를 하면 침엽수는 쇠퇴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아름드리 적송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온통 잎 넓은 상록수와 이색적인 난대림인데 붉은 기둥의 소나무는 한민족의 기상인 양 우뚝하다.

40분을 지나니 살채기도다. 살채기는 사립문, 도는 입구란 뜻으로 예전에 한라산이 방목장으로 이용될 때 문이 있던 곳이란다. 제주도 말은 또 하나의 언어여서 일반인들이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30분 후에 만난 가로 세로가 반듯하게 모가 난 듯한 둔비바위도 두부의 제주말인 둔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등산로는 힘든 오르막이 없다. 용암이 완만하게 흐른 넓은 둔덕을 오르내리며 올라가는 것이니 급경사가 없어 초보자나 어린아이도 쉽게 걸을 수 있겠다. 어느덧 해발 1,300m다. 하늘이 뻥 뚫린다. 아고산대에 접어든 것일까. 나무들의 키가 점점 작아진다.

털진달래와 철쭉이 우점종을 이루고 있다. 20분 만에 평지궤 대피소에 도착했다. 자연 바위굴과 돌을 이용해 만든 무인 대피소이다. 안에 들어가보니 서늘한 기운이 뿜어나온다. 대피소를 지나니 남벽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무 데크로 만든 넓은 전망대에 도착했다. 서귀포시가 한눈에 보인다. 멀리 바다의 수평선도 보인다.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해발 1,400m가 넘는 한라산에서 보는 수평선은 완만한 곡선이다. 남벽 앞 통제소까지 30분을 더 걸어도 이제 사람보다 키가 큰 나무는 없다.

이제 남벽이다. 제주조릿대가 융단을 깔아놓은 무대 뒤로 120만년 전 화구벽이 장엄하다. 검은 벽에서 뿜어나오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안는다. 자연의 웅장함에 인간은 그저 작은 움직임일 뿐이다. 한참을 서 있고 또 서 있어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이 아린다. 남벽을 조금이라도 더 담고자 눈을 부릅떴다.

방아오름의 털진달래는 한껏 부풀어 올라 살짝 건드리면 빨간 꽃잎이 툭 터져 나올 것 같다. 이곳 돈내코 코스의 털진달래는 윗세오름 보다 개화 시기가 1주일 정도 빠르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돈내코~영실 코스는 4월 중순부터 철쭉이 지는 6월초까지 내내 진달래와 철쭉을 볼 수 있는 코스다.

방아오름 샘터가 있다. 물은 밑에서 솟아올라 철철 넘친다. 백록담 물이 솟는 것 같아 신령스럽다. 인근에 시로미가 제 몸을 납작하게 누이고 있다. 시로미는 진시황이 찾았다는 불로초라고 한다. 아고산대를 대표하는 식물로 한반도에서는 백두산과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샘에서 시원하게 물을 마시고 윗세오름을 향한다. 25분을 더 걷자 서북벽 통제소다. 계곡엔 지난 겨울 폭설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빙하지대를 지나가는 느낌이다. 서북벽 통제소에서 백록담 쪽으로 눈길 한 번 주고 윗세오름 휴게소로 간다. 구상나무 군락을 지나 해발 1,700m 이정표 까지 10분이면 도착한다.

대피소를 떠나 선작지왓을 지난다. 넓은 평원에 바위들이 돌출되어 있는 곳이다. 15분 만에 노루샘에 도착한다. 수량도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빈 물통을 가득 채운다. 긴 나무 데크가 깔려 있어 한결 걷기가 편하다. 곳곳에 자연해설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숲 속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가 난다. 한라산 노루의 울음소리다. 멀리서 온 산꾼을 반기는 것인가? 한라산 노루는 1980년대 까지만 해도 멸종 위기에 몰렸으나 제주도민들이 합심하여 복원시켰다고 한다. 5~6월이면 어린 새끼가 태어난단다.

영실 탐방안내소까지 내려가는 1시간 20분의 탐방길은 병풍바위와 영실기암이 내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어머니의 육신을 끓인 죽인 줄도 모르고 먹은 500명의 아들이 모두 바위가 되었다는 영실기암 오백나한 전설은 제주도 어머니의 당찬 생활력을 말하는 것일까? 제주도 갔다 오니 삶이 즐겁다. 산행 문의: 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박영태 산행대장 011-9595-8469.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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