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놀이하는 인간으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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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나 영화평론가 동국대교수

인간은 생각하는 지혜로운 존재이기에 '호모 사피엔스'로 불린다. 그런데 실제 그 생각의 내용이란 게 돈을 벌어 성공하고 출세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돈 벌기용 인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 사회에선 더욱 그런 것 같다.

호모 루덴스 정신의 회복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0년 통계 연보'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두 가지에서 일등이다. 가장 오랫동안 일하며, 가장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자살률은 OECD 평균의 갑절이라니, 이 수치만 보면 좀 살 만하다는 경제지표를 가진 나라들 중에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이란 생각도 든다.

역사는 일등만 기억한다는 어떤 대기업 광고대로라면, 한국은 가장 불행한 나라로 역사에 기억될 판 아닌가. 슬픈 일이다.

삶이 즐겁지 않기에 자발적 죽음을 초래하는 억압적인 공기 속에서 '호모 루덴스' 정신의 복원은 절실하다. 나치의 지배와 전쟁의 공포로 암울했던 시절, 네덜란드 인문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론'을 펴냈다. 문화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아낸 그는 삶의 의미와 행복 역시 놀이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한다.

호모 루덴스는 달리 말하면 예술하는 인간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놀이에 빠져 깔깔대고 흥분하고 끼니조차 잊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어른이 돼 돈 벌기에 빠져 가늠하기 힘든 책임감에 지쳐 떨어져 나가곤 한다. 이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삶이 아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길들여진 자신을 일상적 예술행위로 치유하고 구원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야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남루한 노년 여성의 '시 쓰기'는 루덴스 정신의 복원이다. '즐거운 인생'이나 '브라보 마이 라이프' 같은 영화에서는 직장에서 밀려난 중년 남성들이 왕년에 탐닉했던 음악놀이를 되찾아 즐거운 제2의 인생 살기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찾아보면 그런 유의 영화들은 즐비하다. 프랑스영화 '세라핀'에선 학교에 가본 적도 없는 마을의 가사 도우미 세라핀이 그림그리기로 일상을 구원하는 실화에 바탕을 둔 드라마가 펼쳐진다.

역시 실화에 근거한 '일 포스티노'에선 이탈리아 작은 섬의 우편 배달부가 칠레의 망명시인 네루다와 만나 시를 통해 삶을 해방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마을의 매력적인 아가씨를 유혹하는 연애편지를 쓰려고 배운 시지만, 결국 시 쓰기를 통해 인생이 구원을 얻는다. 예술의 힘이다.

다큐멘터리 '록큰롤 인생'은 어떤가? 영화를 보노라면, 인생은 50부터가 아니라 80부터이다. 마을 공용주택에 사는 노인들이 여가활용으로 노인용 노래를 부르다가 활기찬 록을 만나면서 로큰롤 밴드가 되었다. 노인이 한물 간 인간이 아니라 어떤 노래든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아본 지휘자 밥 실먼의 호모 루덴스 정신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평균연령 80대 초인 이들의 몸은 종합병원이지만 병원에 실려가는 순간에도 노래를 불러 의료진에게 웃음을 준다. 노래하는 순간이 가장 즐겁기 때문이다.

예술이 삶을 구원하리니

평소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걷는 이도 로큰롤을 부를 때면 온몸에 활력이 넘친다. 그런 몸을 이끌고 교도소 위문공연을 가서 밥 딜런의 '영원한 청춘'을 부른다. 노인들의 놀이에 감동한 재소자들은 이런 공연은 처음이라며 노래꾼 노인들과 눈물 어린 포옹을 한다. 적막하고 무료한 노인의 삶은 이들에겐 없다. 삶의 본질인 예술행위에 접속했기 때문이다.

삶의 놀이인 예술은 화가, 문인, 음악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로서의 예술은 삶의 본질이기에 직업에 가둘 일이 아니다. 음주가무를 타고난 호모 루덴스인 우리가 그 정신을 성 산업에 속한 룸살롱이나 널려 있는 노래방에서만 발휘하는 건 인생의 낭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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