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몇 점 아이' 점수표로 줄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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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혁 부산외대 입학홍보처장 러시아어과 교수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얼마 전에 끝나 청소년들이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별을 보고 집을 나서서 별을 보며 집에 들어오는 고통스런 생활을 이젠 잠시 잊어도 되고, 늦게 일어난다고 한들 나무라는 식구도 없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영화관에도 마음대로 갈 수 있다.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지 서글프지만 이 땅에선 오래 전부터 '입시'와 '교육'이라는 두 단어가 내포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어 왔다. '교육=입시'라는 등식이 우리들의 의식과 제도, 우리들이 행하는 온갖 관행 속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능이 끝난 요즘의 고등학교는 연극이 끝난 객석과 같고, 파한 장터와 비슷하다. 교육의 의무를 상실한 듯이 보이는 학교들은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붙들어 둘 명분과 의지를 잃어버린 듯하다. 출석만 부르고서 마지못해 학생들을 학교에 붙들어 두고 있다가, 오후만 되면 곧바로 아이들을 거리로 쫓아내고 있다.

수능 한번에 숱한 가능성 묵살

그러나 이 다디단 해방감도, 이 나른함과 여유도 보름 뒤면 사라져 버릴 또 하나의 환영(幻影)이 아닐 수 없다. "너는 몇 점의 아이다"라고 적힌 점수표를 한 장씩 받아들고 우리 아이들은 다시 긴장하며 자기가 서야할 줄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 데도 시대의 조류, 아이들 개개인의 능력과 적성은 중요하지 않은 사항으로 다시 치부될 것이다. 반면에, 수능 점수가 찍힌 종이 표 한 장이, 마치 그 한 장이 신주 단지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서 받들어 모셔지는 그런 시간이 이내 찾아올 것이다. 이런 해프닝은 이제 관둘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러니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이면서도 교육 후진국이라는 소리만 듣고 사는 게 아닐까.

아니,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요구들을 쏟아내는데 국가와 교육 전문가들은 이렇게 요지부동일까. 어떻게 단 한 번의 필기시험과 단 하나의 잣대만으로 그 많은 아이들의 그 많은 가능성을 무 자르듯이 단박에 규정지어버릴 수 있는 걸까. 지금은 산업화 시대도, 정보화 시대도 아니다. 수많은 다양성과 수없는 새로운 창의성이 각광받는 지식기반 사회라는 새로운 시대다. 새 시대에서는 아이들이 현재 갖추고 있는 수학 능력보다는 앞으로 평생에 걸쳐 갖춰갈 새로운 능력들이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해진다.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지배하는 다가올 '지식에 기반을 둔 지식 창출 시대'에선 절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도 기능할 수도 없다. 전국의 아이들을 모두 한 줄로 세워서 "자, 여기까지는 A대학으로 가라"고 하고, 또 한 토막의 줄을 끊어서 "자, 여기까지는 B대학으로 가라"고 하는 그런 낡은 지도 방식은 작동을 멈춰야 하는 시대다.

달라진 세계는 폭발력 있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의 시대와 세계가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할 교육 전문가들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혁명가적인 자질일지 모른다. 혁명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개혁가적인 자질은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만 흐르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교육 전문가라면 시대 변화를 재빨리 읽고 옛 기준과 잣대와는 하루 속히 결별해야 할 것이다. 천지는 이미 개벽되었는데 옛 사고와 옛 권위를 고집하면서 아이들을 옛날의 세계로 계속 몰아넣어선 안 된다. 아이들을 집단의 일부가 아닌 자기만의 개성을 지닌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귀 기울이면서 아이들과 1 대 1로 대면하고 소통해야 한다.

서열화 잣대 '배치 기준 표' 없애야

먼저 그 유명한 '수능 배치 기준 표'라는 것부터 없애야 한다. 요즘 학원가나 일선 고등학교, 교육청의 진학지원센터 같은 데를 가보면 모두들 이 배치 기준 표라는 걸 만드느라고 정신이 없다. 올해는 수능 표준 점수와 백분위가 공개되어 지난해의 배치표마저 소용이 없어지다 보니 09학년도용의 새 배치표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느라고 더욱 경황이 없어 보인다. 다른 학교, 다른 학원에선 어떤 기준 표를 만들고 있는 지 서로 베끼고 참고한다고 야단법석이 말이 아니다.

19세기에나 통했을 이런 낡은 세계관과 한물 간 대응 방식으론 21세기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곧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배치 기준표가 한 장에서 수험생의 숫자만큼 많아져서 교육의 서열화가 이 땅에서 환영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런 아름다운 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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