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 한 수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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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국 동서대 컴퓨터정보공학부 교수

1887년 남인도의 작은 마을 쿤바코남 태생. 15세에 카(G.S.Carr)의 '순수수학의 기초결과 개요(A Synopsis of Elementary Results in Pure Mathematics)'를 독학. 16세에 쿤바코남대학에 입학했으나 수학 이외의 전 과목에서 낙제하여 1학년 때 퇴학당함. 24세에 '베르누이 수의 여러 가지 성질'이라는 처녀논문이 인도 수학학회지에 실림. 27세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초빙. 33세의 나이로 사망.

수학자들 사이에 오일러(1707~1783)와 야코비(1743~1819)이래 필적할 상대가 없는 천재로 인식되고 있는 수리니바사 라마누잔(Srinivasa Ramanujan, 1887∼1920)의 약력이다. 15세 때 접했던 카의 '순수수학의 기초결과 개요'라는 책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육천 개에 가까운 정리가 아무런 증명도 없이 나열되어 있는 이 책에 몰두하면서 그는 다양한 정리를 혼자 힘으로 독창적인 방법으로 깨우쳐 나갔다.

그는 쿤바코남의 판잣집 툇마루 하얀 석판에 석필로 수식을 쓰고 팔꿈치로 지우는 작업을 반복하여 흡족한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를 그때그때 노트에 옮겨 적었다. 학문적으로는 별가치가 없는 책이지만 그는 이 책을 통해 모든 정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이론을 창조해 나간 것이다.

'베르누이 수의 여러 가지 성질'이라는 처녀논문이 인도수학지에 게재되자 라마누잔의 이름이 인도수학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주변사람들은 그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 알고 싶어 했으며, 또 어떤 대우를 해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종주국인 영국의 수학 전문가들에게 그의 연구결과 수십 가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번번이 성과 없이 되돌아오기를 거듭하다가 네 번째로 의뢰한 케임브리지대학 하디(Hardy, Godfrey Harold, 1877~1947)교수에 의해 마침내 영국 케임브리지로 초빙되었다. 당시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브라만의 계율과 어머니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1914년 영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후 매일 하디의 연구실에서는 라마누잔의 노트를 가득 채운 3천여 개의 공식을 기존 수학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만 두 사람은 그 와중에도 10여 편의 공동논문을 저술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인 그는 전쟁 중에 야채를 구하기 어려워 극심한 영양실조와 고된 연구생활로 인해 알 수 없는 병을 얻었다. 1919년 5년간의 영국 체류를 청산하고 귀국하지만 그 이듬해인 1920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영국에 있던 라마루잔의 연구 노트는 여러 수학자의 손을 거친 후 트리니티의 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76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앤드류즈 교수가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됐다. 그 이후 일리노이대학의 반트 교수가 20여 년 동안 그 증명을 집대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1997년에야 그동안 정리된 것만 5권의 책으로 완성해냈다.

그는 고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천재적인 수학자로 잘 짜인 정규교육의 혜택을 입지 못한 대신 최상의 자유도(degree of freedom)를 누리면서 오직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훌륭한 결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타고난 영재 중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몇몇을 우리는 천재라 칭한다. 용어의 가치하락으로 영재라는 말이 넘쳐나는 요즘, 수많은 우리의 보통아이들이 영재가 되지 못해서 편치 못하기도 한 현실을 보면, 과연 라마루잔이 요즘 우리 주위에 태어났다면 천재적인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 주위에 자유도를 필요로 하는,우리들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천재가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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