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한국 집창촌 100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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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의 역사 / 홍성철 · 페이퍼로드 ·1만8천원

미아리, 청량리 588, 완월동, 해운대 609, 자갈마당…. 한때 사창가라고 불렸고, 지금은 좀 더 그럴 듯하게 '집창촌'으로 불리는 곳. 몇 년 전에는 유례없는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성매매특별법 덕분이다. 그리고 어느덧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집창촌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거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유곽의 역사'는 개항 이후 싹이 튼 집창촌에 깃든 100년 넘는 역사를 더듬어 기록한다. 대략 20년 단위로 어떤 시대적 상황과 구조, 모순 속에서 성쇠를 거듭했는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책 내용이 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 깊이가 결코 얕지 않다.

"성매매 업소는 한국인들의 삶의 궤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은이가 이 책을 쓴 이유이고, 궁극적으로 책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바이다.

전업형 성매매는 1876년 개항과 함께 한반도에 상륙한다.

개항과 함께 생겨난 일본인 집단 거류지가 씨앗이 됐다. 일본의 유곽 여성들이 함께 건너온 것. 1897년 일본의 한 신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일본 상인들이 부산에서 유곽영업을 하기 위해 창기를 모집하고, 유곽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다른 유곽업자들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조선으로 몰려간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인을 대상으로만 성매매를 할 수 있게 했다. 행여 조선인들의 감정을 자극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규정을 까다롭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업자들은 차츰 규정 적용을 받지 않는 조선 여성들에게 눈을 돌렸다. 규정도 규정이거니와 싼 값에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철도역 주변에 집창촌이 많다. 왜 그럴까. 1905년 이후 일제는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거류민단을 설치하고,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철도를 놓았다. 거류민단에서는 재정확보를 위해 유곽을 설치하면서 집창촌이 성업하기 위한 조건들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일제는 집창촌에서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쓰거나 거동이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경찰에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기도 했다. 집창촌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한 셈. 식민지 현실과 1908년부터 실시된 공창제는 이농과 빈곤에 허덕이던 여성들을 집창촌으로 끌어들였다. 유곽이 있던 곳이 도시의 팽창으로 도심이 되면서 이전 요구도 생겨났다.

1947년 공창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사창은 전국적으로 더 많아지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마땅한 벌이를 찾지 못한 여성들은 사창가로 흘러들었다. 대규모 피란민들이 몰린 부산과 대구, 마산, 포항 등에 어김없이 집창촌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집창촌은 정권의 묵인 아래 사실상 육성되기도 했다. 3공화국 정부는 '윤락행위 방지법'을 제정해 성매매를 반대했지만 뒤로는 집창촌을 '특정지역'으로 묶어 묵인했다. 이유는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을 유치해 외화획득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에게도 반공사상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한·미 동맹의 상징적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부산의 범전동 300번지, 해운대 609, 초량 텍사스촌도 한국전쟁 직후 미군을 상대로 문을 열었다.

기자 출신 답게 지은이는 각종 자료와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집창촌을 중심으로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고 대표적 집창촌의 유래, 문학 속 유곽, 영화 속 집창촌 등 다양하게 접근한다. 사회적인 모순과 구조 속에서 모진 삶을 이어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돋보이는 책이다. 김마선기자

msk@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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