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2> 발해사의 자주성과 고구려 계승 문제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한국사 맥 잇는 명실상부한 해동성국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음을 보여주는 6m 높이의 발해 대형 석등(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 소재).

드라마 '대조영'을 통해 잘 알려지게 된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잊혀져 왔던 역사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잘 알아도 발해사를 아는 이는 적었다. 발해가 고구려 앞인지 뒤인지 묻는 이도 적지 않다. 발해국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만에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에 세워진 왕조였다.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28년간 유지되었던 왕조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신라가 992년(B.C.57~935)이나 왕조를 지켰고,고구려도 705년(B.C.37~668),백제가 681년(B.C.18~663),가야는 490년(42~532),고려가 474년(918~1392),조선이 518년(1392~1910) 동안 국가로서 존재했다. 그에 비하면 발해는 단명한 왕조였다.

하지만 중국과 만주지역 왕조에 비해서는 결코 단명한 왕조가 아니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겨우 14년(B.C.221∼B.C.207)동안 존재했을 뿐이다. 수(隋)나라도 37년(581∼618)만에 망했고,유럽인들에게 '황화(黃禍)' 즉 '황인종의 공포(Yellow Terror)'로 천하를 떨게 한 원(元)나라도 고작 97년(1271∼1368)을 버티지 못했다. 발해보다 장수했던 왕조로는 한,당,명,청 뿐이었다. 그마저 한(漢)이 230년(B.C.206~24),당(唐)이 289년(618~907),명(明)과 청(淸)이 각각 294년(1368~1662)과 295년(1616~1911)을 지속했을 뿐이다. 발해는 결코 단명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역사와 문화를 남긴 명실상부한 '해동성국'이었다.

영토에 있어서도 발해는 고구려에 비해 1.5배 그리고 (통일)신라에 비해서는 4배 정도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역을 갖고 있었다. 영역을 고구려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행정제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해사를 보는 시각은 남북한과 중국,러시아가 각각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다. 쟁점은 발해가 과연 자주적인 왕조였는가 그렇지 않고 중국의 주장처럼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는가 하는 점이 첫째이고,다음으로는 발해의 역사적 계승관계와 종족의 뿌리에 관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모두 발해국의 자주성을 인정한다. '당나라 지방정권'설의 핵심은 '책봉'을 당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고구려와 발해를 비롯하여 신라와 백제,왜 등이 모두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책봉'이란 외교적 승인행위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당나라 지방정권'이라는 말은 '중국사'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백제,신라의 옛 땅에서 현대사가 이어오는 남북한과 왜의 일본까지도 중국사의 범주가 된다.

'신당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해는 '사사로이'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는가 하면,그들의 왕이 황제를 자칭했고 당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정도로 자주적이었다. 고구려도 천손의식을 갖고 있던 왕조였으며 수나라를 멸망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도대체 705년 동안 '지방정권'이 변함이 없음에도 '중앙 왕조'가 35회나 바뀌었겠는가 하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발해국의 역사적 주민구성과 역사적 계승관계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시각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가 아닌 '말갈(靺鞨)'인들로 구성된 발해이자 말갈인들에 의해 건국된 왕조로 보고 있다. 대조영도 '신당서'에 의거해서 고구려 장수가 아닌 '속말말갈(粟末靺鞨)'장수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중국학자들 일부는 발해 건국 직후의 국호를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거나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불렀다'는 '구당서'와 '신당서' 기록을 무시하고 발해는 처음부터 국호를 '말갈(靺鞨)'이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갈이란 고구려 변두리 사람들을 깔보아 부르던 비칭(卑稱)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을 통털어 부르던 종족명이었다.

일본에서는 발해를 '말갈국'으로 보기도 하고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그들과 다른 말갈'이라는 두 견해가 있지만 후자가 우세하며,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교과서에까지 채용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조선사개설' 등에서 발해를 '통일신라와 발해' 편목에 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중국과 다르며 한국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도 발해국의 자주성은 인정한다. 다만 발해국이 말갈인들이 세운 중세국가였다는 점이 중국과 통한다. 발해는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한·러 간에 공동으로 발해유적이 발굴되면서 고구려적 요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든 발해사의 진실파악이 학문외적 문제에 얽혀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숙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한 것은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 신청에 자극받아 급작스럽게 수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발해 지역에 대한 '역사침탈' 작전은 이미 1980년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것이었다. 이보다 우선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서남공정'과 신장지역에 대한 '서북공정' 등이 진행되었지만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와 변강사지연구중심 등에서 소수민족 조선족의 고대사도 중국사화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첫 대상은 기록이 엉성한 발해였다.

80년대부터 소수민족사의 중국사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발해사는 그들의 교과서에 이미 '당나라 지방정권' 즉 중국사가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고구려본기를 갖고 있는 고구려사 만큼은 보류되어 오다가 '동북공정'에 이르러 이것이 공식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가 빠지게 되었고 중국 내 주요 고구려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 중국사의 일부로 선전하게 됐다.

고구려나 발해사의 자주성을 근거로 생각할 때 중국의 터무니없는 '당나라 지방정권'설은 '역사왜곡'이 아닌 '역사침탈'로 규정할 수 있다. 동북공정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연구 주제들은 인접국과의 국경문제와 인접국의 정세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우려하는 것 중의 하나는 북한정권의 변화에 따라 북한점령의 역사적 명분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평양수도의 고구려사도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과 동아시아인들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논리이다.

2007년 1월을 기해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끝이 났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주장과 정책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욱 자신감을 갖고 지린성과 헤이룽장성,랴오닝성 정부는 고구려와 발해사의 중국사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역사가들은 학자가 아닌 역사전략가가 되어가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이 '국사' 책을 버리고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고구려,백제,신라,발해 나아가 수·당과 요·금사를 비롯해서 왜와 일본사를 언급하는 것이 더 학문적이라는 국사해체론은 그런 의미에서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국사나 일본사가 전보다 패권적이고 우경화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은 너무 낭만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평화나 미래학의 입장에 있는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에 바탕하고 있다기보다 정치적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그것이 비록 현대 국가사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동아시아의 평화는 역사를 조작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면서 지혜와 화합을 모아갈 때에 얻어지는 것이다.

-끝-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