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 없이 술술 넘어가는 편안함, 그게 참맛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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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막걸리를 말하다

부산산성양조 김태윤 대표가 커다란 철제 발효통 에서 막걸리가 발효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새벽 5시. 인적 없어 조용한 도심을 시큼하고 구수한 냄새가 적신다. 구수함은 고두밥을 찌는 것이고, 시큼함은 그 고두밥에 누룩이 더해져 발효되는 것이다. 막걸리 되어가는 냄새다. 부산 금정구 부곡동 235의 1. 상가와 아파트로 둘러싸인 이곳에 술 익는 냄새가 나는 것은, 거기에 83년의 역사를 가진 양조장, 부산산성양조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물·쌀 누룩… 발효가 핵심"

도심에 어찌 이런 양조장이! 그런 생각이 들 법한데, 김태윤(67) 대표는 물이 좋다고 한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금정구 부곡동의 지하수가 의외로 수질이 좋다는 것이다. 보건당국의 각종 수질검사 항목에서 웬만한 산골의 물보다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단다.

막걸리 만드는 작업은 이미 한창이다. 새벽 4시부터 시작돼 이때면 절정이다. 지름이 어른 양팔 길이인 커다란 철제 발효통(양조장에선 사입탱크라 부른다)에선 술이 발효되면서 보글보글, 때로는 톡톡거리며 끓어 오른다. 술이 살아 있는 것이다. 신기하다.

발효통마다 끓는 술의 빛깔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건 유백색으로 순하고, 또 어떤 건 노란빛 기름기가 도는 느낌이다. 김 대표가 말한다.

"술 만드는 누룩이 밀로 된 것은 이리 노란 빛깔이 나요. 순 쌀로 만든 건 말간 백색이지. 쌀에는 기름기가 없기 때문이야. 우리는 순 쌀로 만든 누룩, 쌀과 밀 반반의 누룩, 그렇게 두 가지 종류의 술을 만듭니다."

쌀 누룩? 현재의 일반 막걸리는 밀기울 등에 종균을 배양시켜 누룩을 만드는데, 부산산성양조에선 별도의 무균실을 설치해 쌀에 종균을 배양시켜 누룩을 만든다고 한다. "그렇게 쌀 누룩으로 만들어야 '진짜' 100% 쌀막걸리지, 바로 우리 '쌀탁'처럼!" 은근한 자랑이다.

한쪽에선 그렇게 해서 처리돼 나온 술들이 줄 지어 주입기를 통해 병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쪽에선 그렇게 나온 제품을 포장하느라 손길이 잽싸다. 이 새벽에 이리 바쁜 곳이 있었나 싶다.

막걸리, 특히 효모가 살아 있는 생막걸리는 만드는 즉시 재빨리 공급하고 가능한 한 일찍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제조 후 이틀 정도 지난 게 제일 맛나는데, 열흘 정도면 상해 버린다. 냉장시설이 없던 옛 시절, 상하지 않은 막걸리를 당일 배송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작업하던 전통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는 막걸리 제조의 핵심은 발효라고 생각한다. 발효를 잘못하면 맛을 망칠 뿐만 아니라 사람 몸에도 해로운 성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발효 과정에서 잘못하면 야생균이 죽어버립니다. 그럼 야생균 대신 젖산발효를 하거든요. 젖산발효가 되면 바이오제닉아민이라는 해로운 성분이 나와요. 옛날 촌에서 나온 막걸리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고 머리가 아픈 경우가 많잖았습니까. 그거 때문입니다. 그거 없애는 게 기술입니다."

방금 여과되어 술꼭지에서 흘러나온 막걸리는 어떤 맛일까? 김 대표는 "2~3일 지나야 당분이 제대로 분해돼 맛날 텐데…"라면서도 한 바가지 떠서 건넨다. 따끈한 첫 술! 뭔가 불안하면서도 씁쓸함과 새큼함이 섞인, 희한한 맛!



'기찰 막걸리' 옛 영광 재현의 꿈

다른 영세 양조장이 다 어려운 지금 부산산성양조는 꽤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총 20억 원 정도. 그 중 8억 원 정도가 일본 등 해외 수출에서 벌어들였다. 국내 시장에선 한계를 느껴 해외로 눈을 돌린 결과인데, 올해엔 미국 본토, 괌, 캐나다, 호주 등에까지 판로를 넓힐 계획이다.

하지만 김 대표가 염원하는 바는 '기찰' 막걸리의 옛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것이다.

구한말 동래부가 있었던 시절, 지금의 부곡동 언저리에는 다른 지역에서 동래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검문소가 있었다. 그 검문소를 기찰(譏察)이라 했다.

사람의 왕래가 많다보니 자연 주막이 형성됐고, 술맛도 평판이 높았다. 그 술을 '기찰 탁주'라 불렀는데, 김 대표의 부친 김학도(1975년 작고) 선생이 그 맥을 이어 1928년 양조장을 세우고 기찰 탁주를 만들어 팔았다.

"1960년대만 해도 이 지역은 부산의 끝, 촌동네였어요. 그런데 해운대, 송정, 심지어 지금의 남부민동까지 배달이 됐으니까. 1967년 부산시내 42개 탁주공장이 주세법 개정으로 통폐합돼 부산합동탁주가 됐을 때, 그때 주조장 전체 판매액의 40%를 기찰 탁주가 차지했어요. 잘나갔던 거지. 당시는 부산의 대표 막걸리였던 겁니다."

그러다 합동탁주와는 별도로 1971년 부산약주양조공사를 설립, 약주를 제조하다 1979년 부산산성양조공사로 회사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다 2002년 탁주 제조면허를 취득해 국내 판매용 막걸리를 만들어 내는 실질적인 재창업을 이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생산하는 제품은 '기찰쌀탁'과 '기찰생동동주', '산성막걸리'를 비롯해 수출용 살균 막걸리와 복분자술 등 대여섯 가지. 최근에는 지리산에서 나는 장뇌삼 가루를 넣은 산삼막걸리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맛

"종류는 여럿 돼도 되도록이면 시류에 안 휩쓸리려 합니다. 시중엔 젊은 층 입맛에 맞춘다고 달게 한다든지, 사이다 느낌 나게 한다든지, 심지어는 레몬맛까지 나게 한다는데, 우린 그냥 옛날, 농사 짓고 술 담아본 사람들이 좋아라 할 그런 맛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순하고, 또 누룩 냄새도 좀 나고…."

말하자면 막걸리는 입이나 목에 걸리는 게 없이 막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게다. 그게 옛 기찰 탁주의 맛이란 건데, 김 대표는 지금은 거의 그 맛을 되찾았다고 한다. 걸림이 없이 막 마시는 술! 낯설지만 절묘한 막걸리의 정의라 하겠다.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사진=김경현 기자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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