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인+간)] 전설의 선장 조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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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명 앗아간 그 바다에 다시 맞선 '미친놈' '난파선 수협' 키 잡아 '최우수'로 살려내다

조동길 대형기선저인망수협 조합장이 부산 서구 남부민동 본점 사무실에서 화려했던 옛 어선 선장 시절을 되새기며 이야기를 풀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 1974년 동중국해 대참사, 선원 72명 가라앉다

성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달려든다. 요동치는 고깃배를 진정시키려 조타기에 매달려 보지만 헛수고다. 물결이 너무 높아 바로 앞 종선(從船)의 마스트(돛대)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열대성 저기압이 갑작스레 몰고 온 세찬 파도에 어선은 이리저리 미친 듯 춤을 췄다. 12~13명의 선원을 태운 고깃배들은 폭풍 속에서는 종이배와 다름없었다.

"어어, 배가 가라앉습니다."

"파도가 덮쳤습니다. 선원들이 물에 뛰어듭니다."

부산어업무선국과 연결된 전파교신장치의 비상주파수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같은 바다에 함께 떠 있던 어선의 동료들이 죽음의 공포에 몰려 울부짖었다.

"삐삐…. 뚜…."

그러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차례로 교신이 끊어졌다.

1974년 8월 28일 이른 아침 전라남도 소흑산도 인근 해상. 열대성 저기압이 우리 쌍끌이 어선 선단을 덮쳤다. 성난 파도와 바람은 삽시간에 7척의 배를 삼켰다. 순식간에 72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사상 최악의 조업 사고다.

전날 저녁 동중국해에서 집단조업하던 300여 척의 우리 어선들은 열대성 저기압 예보를 받고 피항하던 길이었다.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저기압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상정보가 있었다. 선원들은 허술한 국내 기상정보 대신 일본과 대만 라디오방송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너무 늦은 정보였다. 미처 내항으로 피항하기도 전에 성난 폭풍이 밀려와 배와 선원들을 삼켜버렸다.

"아! 내 삶도 여기가 끝인가…."

눈앞에 펼쳐진 아비규환에 나이 스물다섯의 청년은 조타실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미친 듯 몸체를 뒤흔드는 쌍끌이어선에서 죽음의 공포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청년. 지금은 대형기선저인망수협을 이끌고 있는 조동길(세화수산 대표) 조합장의 38년 전 모습이다.

'사각사각' 쥐들이 뭔가를 갉았다
알고 보니 내 발뒤꿈치 각질이었다
꼼짝도 하기 싫어 그냥 내버려뒀다

'저승서 벌어 이승서 쓴다'던 선원삶
한계 상황 극복하니 두려운 게 없어
'20대 선장' 이어 '20대 선단장' 되다


■ 열아홉 살 청년, 바다를 만나다


열아홉 살에 처음 고기잡이배에 올랐다. 1968년 고향 경남 남해군에서 해군에 지원하러 부산에 왔다가 우연히 어선을 타게 됐다. 배를 갖고 있던 고향 선배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바다로 나섰다.

남해군 이동면 화계리에서 나서 자란 그는 남해수산고를 나왔다. 앞으로 배를 타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학교에 간 건 아니다. 친한 친구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함께 같은 학교에 가게 됐다. 남해수고 2학년 때 집안의 대들보였던 큰형이 큰 병을 앓다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젊은 형수와 젖먹이 조카 셋이 남았다. 곧이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갑자기 심한 열병을 앓다 끝내 눈을 감으셨다. 자식을 잃은 지 28일 만에 그 뒤를 따라 간 것이다.

'이제 의지할 곳 없이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

슬픔에 빠질 겨를도 없이 소년 조동길은 마음을 굳게 다졌다. 해기사(항해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선장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딴 자격증을 들고 조타기술병으로 먼저 해군에 다녀오려다 부산에서 덜컥 선원이 돼 버렸다.


■ 한계상황에 맞서다

68문창호. 99t급 쌍끌이어선이다. 고깃배 치고는 비교적 규모가 있는 대형선에 속한다.

멋모르고 나간 바다는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고통이었다. 바다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요구했다.

선원실에 겨우 몸을 누이면 쥐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이놈들이 이빨로 무언가를 갉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발이 쓰린 느낌이 들었다. "발뒤꿈치 각질을 갉아먹는 소리였습니다. 일어나 보니 뻘겋게 피가 맺혀 있었지요. 나중에는 뻔히 알면서도, 피가 맺혀 쓰라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버려두게 되더군요. 격한 노동과 추위에 지쳐 쓰러져 있다 보면 꼼짝도 하기 싫거든요. 쥐가 발뒤꿈치를 갉아먹든 말든, 피가 나든 말든 시체처럼 누워 있다 다시 차례가 오면 그제야 몸을 일으켰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1주일 동안 소금과 물고기만 먹고 버티기도 했다. 구운 생선으로만 끼니를 때웠더니 뒤에는 위경련이 왔다.

홍어 조업지인 서해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 앞바다. 한겨울 이곳에 북서계절풍이 덮치면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를 밑돈다.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한 강추위 속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 날 밤을 맞을 때까지 쉬지 않고 어망을 수리한 적도 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상황이 끝없이 펼쳐졌다.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 당시 쌍끌이어선을 타는 선원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예전의 선상 생활은 사람을 한계상황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고생을 겪고 나니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는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조동길 조합장이 부산 남항을 막 출항하려던 자신 소유의 대형트롤어선 `8세화호`(139t급)에 올라 조업 채비를 살피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 다시 바다로

몇 번의 조업을 다녀오니 영장이 나왔다. 운 좋게 육군본부에서 군생활을 했다. 제대한 이듬해인 1973년 서울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회의가 들었다. 공무원 벌이로는 가족을 번듯하게 챙기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뒀다.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탄 지 두 달 만에 72명의 동료를 눈 앞에서 잃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배를 다시 탈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요즘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서리친다.

하지만 그는 '미친놈'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벼랑 끝에 선 청년은 바다에 미칠 수밖에 없었다. 주저 없이 바다의 외길을 선택했다. 저 무서운 바다에서 꼭 성공하겠다고 맹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배에 다시 올랐다. 항해사로 배 운항을 책임졌다. 고된 선상 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제대 후 다시 배를 타고 1년 4개월 만에 선장이 됐다.

나이 서른에 국내 1인자 자리 올라
6년 연속 '최고 어획고' 전설 되다
9년간 선장 활약하다 선주로 변신

IMF로 파산 맞은 수협 조합장 맡아
전용차 없애고 판공비도 반납
1년 만에 흑자 전환 '전국 1등'으로

■'전설의 선장'

남해 출신의 선장은 고기를 찾아 거침없이 바다를 누볐다. 선장이 된 지 8개월 뒤에는 쌍끌이어선 1통(2척)을 총괄하는 책임선장(선단장) 자리에 올랐다. 나이 서른이 채 되기 전이다. 국내에서 20대 선단장은 유례가 없었다. 그 즈음 선단장은 50~60대가 보통이었다.

한국 어업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 젊은 나이의 '조 선단장'은 서른에 국내 1인자가 됐다. 선단장이 된 지 불과 3년 만의 일이다. 쌍끌이어선 가운데 가장 높은 어획고를 올리며 그는 이름을 날렸다. 그는 최고의 기록을 무려 6년 동안이나 유지하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최고의 선단장에게는 경제적 혜택도 두둑하게 돌아갔다. 이른바 일류 선단장은 어획고에 따라 별도의 인센티브를 받는다. 사실 선주는 배를 소유하고 있을 뿐 어선의 현장 경영은 모두 선단장의 손에 맡겨져 있다. 선단장은 선원 운용, 어장 파악, 기상 판단 등 선박 운항 및 조업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선주를 대신해 판단하고 결정한다. 고기를 많이 잡고 적게 잡고는 순전히 선단장의 머리와 손에 달려 있다. '몸값'이 가장 높았던 그의 손에는 보통사람들이 짐작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이 떨어졌다. 그는 어느새 국내 어업계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부산 서구 남부민동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수협 직원들과 함께 위판 어류를 살피고 있는 조동길 조합장. 이재찬 기자
■ 몸을 던져라

"배에서 1년 동안 베개를 베고 눕지 않았습니다. 30분을 넘겨 자지도 않았습니다. 1년 내내 조타실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 토막잠을 잤습니다. 바다 밑을 끄는 쌍끌이어법 때문에 길게 잘 수가 없었지요. 수심과 장애물 등 바닷속 상황을 끝없이 체크해야 합니다. 해도를 정밀하게 분석한 다음 신경을 곤두세워 암초와 침몰선 등 장애물을 피해야 하거든요."

30분 단위 토막잠만 자다 보니 어느샌가 시계를 보지 않고도 30분 만에 눈이 떠졌다. 그 오차도 3분 이내로 좁혀졌다. 더욱 신기한 건 짧은 수면 사이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예지력까지 느껴졌다. 잠깐의 꿈에서 암초가 다가오면 실제 어김없이 암초와 맞닥뜨렸다.

국내 최고라는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초인적 의지로 자기를 이겨낸 끝에 성취해낸 성과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스스로를 위해서 노력하고 애썼더니 그게 기특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항해사 시절에는 선장이 잠자는 사이 해도와 등대만 보고 혼자서 동중국해에서 인천항까지 배를 몰았습니다. 잠에서 깬 선장이 깜짝 놀랐습니다. 선장들도 까다롭게 여기는 항로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몸을 착실하게 움직였더니 주변에서 과분하게 인정해 주더군요. 가장 짧은 기간에 선장과 선단장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을 굳이 꼽자면 이것밖에 없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다에 승부를 건 그는 이렇게 꿈을 이뤘다. 위험이 있더라도 큰 성과를 일굴 수 있는 바다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벼랑 끝에 꽃을 피운 귀하디 귀한 난을 꺾기 위해서는 꼭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세상이다.

 
■ 침몰 위기 수협의 키를 잡다

9년의 선장 생활을 접고 36세 때부터 선주로 변신했다. 배를 한 척, 두 척 사들여 5척까지 보유했다. 세화수산. 그가 설립한 회사 이름이다. 어느새 그는 80여 명의 선원을 거느린 선주가 됐다. 수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로까지 일을 키우며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거듭났다. 이제는 좀 누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험난한 책임을 억지로 떠맡았다. 2000년 조합원들의 추대 형식으로 대형기선저인망수협의 조합장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IMF 구제금융 여파로 파산 위기에 허덕이던 수협 정상화의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사업부진과 악성채권 등으로 조합은 사실 이미 장부상으로는 파산이 난 상황이었다.

수렁에 빠진 조합을 맡기에 앞서 그는 조합장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말끔히 반납했다. 월급을 뭉텅 깎고 조합장 전용 승용차를 없앴다. 전속 운전기사를 사양하고 지급되는 휴대전화는 해지했다. 조합장에게 보장된 판공비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새롭게 조합을 책임지게 된 조 조합장은 누릴 것은 철저히 버리고, 책임져야 할 것은 악착같이 챙겼다.

"지금도 조합장 판공비 카드는 안 씁니다. 지난해 제가 사용한 조합 카드 내역을 봤더니 1건에 26만 원이더군요."

조 조합장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방만한 조합을 다잡아 챙겼더니 서서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머금고 인력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뼈를 깎는 몸부림 끝에 조합은 2년 만에 정상 궤도에 올랐다.

2005년 대형기선저인망수협은 국내 수협 가운데 최우수 수협에 선정됐다. 이후 지금까지 7년째 최우수 수협의 명예를 지켜가고 있다. 한 해 3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보던 수협은 지난해 60억 7천800만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지금은 국내 92개의 업종별, 지역별 수협 가운데 공적자금을 받은 수협을 빼고 경영성과 1등을 자랑한다. 그는 국내 농·축·수산업 협동조합에서 역대 유일무이한 4선 무투표 추대 조합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 선장, 조합장, 그리고…

선장 시절에는 개인의 성취감을 채우는 재미로 일했다. 조합장은 달랐다. 자신의 욕구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여러 유혹이나 협박, 타협과 싸워야 했다. 돈을 만지고 살림을 책임지는 만큼 정직성을 앞세워 초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는 이제 큰 바람이 없다. 주변에서 수시로 그럴듯한 부추김이 있지만 크게 마음이 쏠리지 않는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지 않습니까.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오기가 힘든 법입니다. 보다 더 많은 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이 행복합니다."

예순을 넘긴 그의 얼굴은 그의 말만큼이나 평온하다.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약력

1948년 11월 경남 남해군 출생

1967년 2월 경남 남해수산고 졸업

1984년 6월 세화수산 대표(현)

2000년 5월 대형기선저인망수협 조합장(현) 부산시 수영연맹 회장(현)

2001년 7월 한국수산회 부회장(현)

2003년 5월 은탑산업훈장 수상

2007년 2월 동아대 경영학부 졸업

2007년 5월 부경대 겸임교수(현)

2010년 10월 부산광역시 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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